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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송정희 간찰(宋正熙 簡札)
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6_01_A00143_001
- ㆍ입수처
- 안동권씨 청풍당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862년 송정희 간찰 / 宋正熙 簡札
- ㆍ발급자
-
송정희(宋正熙, 1802~1881)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1862년 12월 28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壬戌十二月卄八日
- ㆍ형태정보
-
점수:크기: 25.5 × 41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1862년 12월 28일 송정희(宋正熙, 1802~1881)가 권계학(權啓學, 1716~1778)의 후손에게 쓴 답신으로서의 간찰
- ㆍ기타사항
- 오죽헌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 ㆍ수장고
- 이름: 서가위치: 단위치:
해제
1862년 12월 28일 송정희(宋正熙, 1802~1881)가 권계학(權啓學, 1716~1778)의 후손에게 쓴 답신으로서의 간찰이다. 송정희의 자는 문오(文吾), 본관은 은진(恩津), 부친은 송계락(宋啓樂), 생부는 송계근(宋啓根)이다. 1834년(순조 34) 의 식년시 진사 3등 42위로 입격한 뒤 음직으로 최말단 관직인 참봉직을 제수받았다. 영릉참봉(寧陵參奉)‧홍산현감(鴻山縣監)‧공조좌랑‧보은군수‧양양부사‧나주목사‧사복시정‧공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대과가 아닌 음직으로 관직에 나간 경우에는 비교적 낮은 직위에 머물렀다. 이런 일반적 사정에 비춰보면 송정희는 비교적 높은 직위에 오른 셈이다. 1861년부터 1863년까지 양양부사(襄陽府使)로 재직했고,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이임했다. 권찰방(權察訪)이라는 표현은 수신자의 선조인 권계학이 1765년부터 1767년 하반기까지 충주시 연수동에 있던 연원역(連原驛)의 찰방으로 있었던 사실에서 연유한 것이다. 호해정(湖海亭)은 강릉시 저동, 경포호의 북쪽 언덕에 있는 정자이고, 현산(峴山)은 양양고성 현내에 있던 산이다. 송정희가 양양부사를 지내고 있었으므로, 현산리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 간찰에는 강릉부사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 당시의 강릉부사는 홍재우(洪在愚, 1806~ )였다. 그는 가평에서 왔으나 1863년 7월 3일에 의성(義城)으로 전직되었다. A006_01_A00146의 1863년 2월 21일에 쓴 간찰에서 양반인 최씨가 소장을 내었고 자신이 처분을 하였는데, 향후 일이 순조롭게 처리될지는 본관의 처분에 달려있다고 한 것은 이 말과 관련되어 있는 듯하다.
이 간찰을 쓰기 전에 권계학의 후손인 모인이 호해정에 관련된 일을 알려주었고, 이에 대해 답하면서 안부를 전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바빠서 안부를 여쭙지 못하다가 겨우 장사치를 통해 서신을 전달했는데, 자신의 서신이 아직 도착하기도 전에 상대의 서신이 와서 급히 열어봤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이어서 장사치[市便]를 통해 편지를 전했는데 자신이 쓴 편지를 받아보시기도 전에, 서신을 보내주셔서 황망히 글을 읽으니 격조하던 차에 위로가 되는 듯하다고 한 후, 며칠 후에 안부를 여쭙게 되니 곧 그리움을 이겨낼 수 없다고 했다. 자신은 타지의 소임지에서 고요히 지내고 있으니 온갖 감정이 그득한데 집안의 편지가 오랫동안 오지 않아 걱정이라고 했다. (송정희는 대전사람으로 A006_01_A00144_001 간찰에서 홀로 된 형수가 숙환으로 오랫동안 고생하고 있다는 말을 한 것이 본문의 오랫동안 연락을 받지 못해 노심초사하여 병이 들 지경이라고 한 말의 배후사정일 것이다.) 이후 본론에서 강릉부사가 서울로 간 후 나오지 못하여 돌아오지 못하니 한탄스러운데 호해정의 일은 속으로 염려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직 자세히 듣지 못하다가 이번에 서신을 보니 크게 다행한 일이라고 했다.
원문
烏竹軒執事 回納 權察訪宅
峴山吏 謝書
以邑隷之奔汨無暇 不得專探近日起居 纔因市便修候 未及入照 而惠翰自何轉到 忙手披玩 恰慰積阻之懷 信后有日 恪詢間者 靜候萬衛 旋庸溯仰不任 世下 客館涔寂之中 百感弸結 家信久阻 慮鬱成病 奈何奈何 且貴府城主 入京以後 亦無出門之路 將不得歷進那中 極爲悵嘆 湖海亭事 雖黙料其無慮 而以未卽詳聞 政庸悶鬱 今承教意 豁幸萬萬 餘適忙擾暫此 歲除只隔數日 惟祝迓新增祉 姑不備謝禮
壬戌十二月卄八日 世下 宋正熈 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