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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6_01_A00134_001
- ㆍ입수처
- 안동권씨 청풍당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767년 권진응 간찰 / 權震應 簡札
- ㆍ발급자
-
권진응(權震應, 1711~1775)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권계학(權啓學, 1716~1778)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丁亥至月十九
- ㆍ형태정보
-
점수:크기: 25.6 × 35.3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1767년 11월 19일 권진응(權震應 1711~1775)이 권계학(權啓學, 1716~1778)에게 쓴 간찰이다. 권진응은 자는 형숙(亨叔), 호는 산수헌(山水軒),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증손이며 한원진(韓元震)의 문인이다. 아버지는 제주 목사 권정성(權定性)이고, 아들은 권중정(權中正)과 권중립(權中立)이다. 1771년(영조 47) 영조가 산림 세력을 당론의 온상으로 배척한 『유곤록(裕昆錄)』을 만들자, 상소를 올려 이를 논하면서 증조부 권상하를 변호하였는데 이로 인해 그해 3월 14일 제주도 대정현으로 유배되었고 다음 해인 1772년에 연로한 나이로 특별 사면을 받아 해배되었다. 권진응이 자신이 있는 곳을 ‘황강(黃江)’으로 표기하였는데, 황강은 충청도 청풍군(淸風郡) 한수면(寒水面) 황강리로, 수암(遂菴) 권상하가 서실 한수재(寒水齋)를 짓고 평생 은거하며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다. 1765~1767년 사이에 권계학은 연원역(連原驛)의 찰방직으로 있었다. 연원역은 충주에 있었으므로 권계학과 권진응은 지척지간에 거주하고 있었고 권진응의 사촌인 권제응(權濟應, 1724~1792)은 1766년 삼척부사를 지낸 바 있었으므로, 강릉출신인 권계학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런 이유로 권진응과 권계학 사이에는 자손에까지 이어지는 뿌리 깊은 연대가 존재한다. 간찰에서 병계(屛溪) 선생이라고 하는 이는 한원진과 함께 호론(湖論)을 주장한 윤봉구(尹鳳九, 1681~1767)를 일컫는다. 발급자인 권진응은 권상하의 증손이자 한원진(韓元震, 1682~1717)의 문인이다. 윤봉구는 한원진과 함께 권상하의 문하에서 수학한 강문팔학사의 한 사람의 호락논쟁의 중심인물로 꼽힌다. 모두 권상하의 맥을 잇는 이들로 권진응과도 가까운 관계였을 것으로 보인다. 윤증(輪症)은 전염병을 이른다.
질병을 앓고 있다고 한 것에 대해 안부를 묻고 자신도 같은 증상으로 고생하고 있음을 말한 것이 주요 내용이다. 단순히 안부를 묻는 간찰이다. 상대가 병을 앓고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자신과 온 가족도 마찬가지로 전염병을 앓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서 이로 인해 고모와 병계선생 즉, 윤봉구 선생이 돌아가셨고 이처럼 상을 알리는 내용이 매일같이 이어지고 있으니 고통됨을 어찔 말할 수 있는가 하고 새로 온 관찰사가 편의를 따라 하려 하니 이것이 기쁜 일이라고 했다. 끝으로 보내준 방어(아마도 권계학이 고향인 강릉으로 돌아간 후, 방어를 선물로 보냈을 것이다.)는 밥맛이 없던 차에 특히 도움이 되었는데, 감사의 말을 끝없이 하고 싶으나 간찰을 가져온 이가 빨리 답장을 달라고 재촉해서 급히 마무리한다는 말로 글을 맺고 있다.
원문
連郵政堂 入納
黃江 謝書 省式謹封
省式 近來阻聞 方以爲菀 伏承下狀 謹審以輪症 起居欠和 何等奉慮 震 亦以是症 一家老少 無人或免 而老者最中 其毒首尾月餘 厪延一縷 而姑母之訃 屛溪尹先生之喪 鎭日相聞 公私從此 更無依仰之地 痛毒何言 鄕宰喪報相續 運氣可異 新道伯 想順便 是可喜 口味頓變 下箸無物 添一憂患 而所惠魴魚 珍謝無已 來奚立促 擾草不謹 只冀行李保重 伏惟下照
丁亥至月十九 服人 震應 頓首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