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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해제
계사년(1893) 9월 20일에 김학진(金鶴鎭)이 팔촌형인 강릉부사 김정진(金靖鎭)에게 강릉부 오죽헌에 사는 권원식(權遠植)의 산송(山訟)을 청탁하는 간찰이다. 먼저 팔촌형의 관직 생활의 안부와 관아에 있는 식구들 및 새로 태어난 아이의 안부를 물은 뒤, 자신은 관함(官銜)에 얽매어 벗어날 길이 없으며, 아침저녁으로 공무에 시달리고 있어 괴롭다는 근황을 전하였다. 본론으로, 팔촌형이 다스리고 있는 강릉부 오죽헌에 살고 있는 권원식이 집터와 솔밭을 순포리(荀浦里, =蓴浦里)에 매입해 두었다가 작년인 1892년 10월로 이장할 날짜를 정했는데 이장 예정일 이틀 전에 누군가가 이장할 자리에 투장(偸葬)하였다는 내용의 산송을 언급하였다. 이어서, 이 편지가 도착한 즉시 관에서 투장묘를 파내어 권원식이 편안하게 이장할 수 있게 해줄 것을 부탁하고, 전에도 이렇게 부탁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모두 청탁을 받은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이 일은 친숙(親熟)한 인사(人事)와 관계되므로 의례적인 부탁으로 돌리지 말 것을 거듭 간절하게 당부하는 내용이다. 편지의 말단에 권원식은 대사간을 지낸 권종륜(權鍾崙)의 손자로 1년 전에 안장할 계획이었음을 추록하였다. 이 사건은 1892년 10월에 권 씨의 종 삼복이 강릉부사에게 올린 발괄인 ‘A004_01_A00426_001’과 1893년에 미상의 발신자가 강릉부사에게 보낸 간찰 사본으로 추정되는 ‘A006_01_A00102_001’을 통해 사건의 전말과 내막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던 산송은 해당 지역의 수령이 일차적인 판결권자였기 때문에 이러한 청탁은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흔한 예였다. 이 간찰은 강릉의 대표적인 명문가 후손인 권원식이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관할 수령에게 산송을 청탁하는 내용을 주로 담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보편적 관행을 실증하는 자료로 평가된다. 이 간찰의 발신자인 김학진은 본문의 ‘尙縻喉銜’ 등을 통해 관직에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으며, 이는 후몽(後夢) 김학진(1838~1917)으로 추정된다. 김학진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성천(聖天)으로, 조선후기 관료이다. 1871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로 관직을 시작한 뒤 승정원 동부승지·성균관 대사성·한성부 좌윤·이조 참판·도승지·형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전라도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자 감사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9월 자진 사퇴하였다가 1897년 다시 임용되어 중추원 의관 등을 지냈다. 1905년 최익현의 상소를 적극 옹호하였으며, 동년 3월 일제의 국권 침탈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일본 헌병에 체포되기도 하였으나 이후 일제에 협조하였다. 1910년 남작주2의 작위를 받았고, 1911년 1월에는 한일합병에 관한 공로로 2만 5천원의 은사공채를 받았으며, 1912년 12월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고 종4위에 서위되었다.
원문
上候書
霜暉晶淸 伏問玆辰 政體候萬安 衙中俱穩 新兒日益婠妠 供歡區區 竝切伏頌 三從弟尙縻喉銜 解脫無門 夙夜在公 實難支吾 苦哉苦哉 治下烏竹軒居權遠植 故大諫鍾崙之孫 而年前爲入葬計家基與松田 買置於荀浦里 以昨年十月 擇日移窆矣 前期二日 不知何人 偸埋其所占處 人心雖曰不淑 豈有如許變怪乎 書到卽爲官掘 使權雅得以安厝 如何如何 前者此等之囑非一 而皆被囑者 至於此事 果係親熟人事 勿歸例托 申仰申仰 悤悤不備上候禮 癸巳九月卄日 三從弟鶴鎭 再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