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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년(1861-1863) 홍재우 간찰(洪在愚 簡札)
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6_01_A00076_001
- ㆍ입수처
- 안동권씨 청풍당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미상년(1861-1863) 홍재우 간찰 / 洪在愚 簡札
- ㆍ발급자
-
홍재우(洪在愚, 1806~)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 ㆍ형태정보
-
점수:크기: 24.4 × 58.3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미상년(1861-1863 사이 추정) 즉일에 홍재우(洪在愚, 1806~?)가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 ㆍ수장고
- 이름: 서가위치: 단위치:
해제
미상년(1861-1863 사이 추정) 즉일에 홍재우(洪在愚, 1806~?)가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이다. 발급자는 특별한 관계호칭이 없이 그대로 자신의 성명을 직서하여 상대와 평교 정도의 사이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피봉은 별도의 단봉으로, 전면에 ‘仙閣 謝狀’이라는 기록을 통해 발급자는 당시 ‘명선각(溟仙閣)’이라는 곳에 거주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우측에 ‘竹軒 回展’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청풍당 안동권씨 문중에 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발급자와 비슷한 연배의 인물로 죽암(竹巖) 권계학(權啓學, 1716~1788)의 후손인 사죽당(思竹堂) 권박(權樸, 1773~?)의 아랫대일 가능성이 크다.
녹음이 짙어지고 비 올 기미가 농후해져 그리운 마음만 들던 차에 상대의 종씨를 통해 근황을 알게 되었고, 편지까지 받게 되어 이를 통해 기거하는 일상의 건강이 좋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자신은 병과 바쁜 일로 지내고 있는 근황을 알렸다. 광릉(廣陵, 廣州)의 관광에 관한 일은 아들이 주관했던 것인데, 일전에 경호(鏡湖)로 갔던 아들이 시를 보여주어 이 늙은이의 흥취를 이기지 못하고 갑자기 시구를 만들어 보았다고 하면서, 이를 써서 보내니 간장종지 덮개로 사용하라고 하였다. 조만간 상대의 왕림을 자리를 쓸어두고 기다리겠다고 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관료이면서도 한 명의 문인으로서 풍류를 즐기던 발급자의 삶과 의식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본편 간찰 1건과 별도로 별지 1건이 동봉되어 있다. 7언 율시 1수로 이루어져 있으며, 운자는 ‘時’, ‘期’, ‘詩’, ‘知’, ‘枝’이다. 본문에서 언급된 ‘아들의 유람’과 관련하여 “갑자기 작성해 본[猝有是成]” 차운시가 이것으로 추정된다.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宿緣鏡浦已多時 경포와 묵은 인연 이미 많은 나날인데
今許諸君摠不期 그대들은 이번에도 기약 없이 모였구나
過境幾斟三斗酒 지나는 경계마다 서 말 술을 나누면서
名樓尙負一篇詩 이름난 누각에선 한 편 시를 짓누나
眼前湖海難相辨 눈앞의 호수 바다 서로 분간 어려울새
去後桑田有孰知 떠난 뒤 상전벽해 어느 누가 알겠는가
白髮如吾空悵望 나 같은 백발노인 부질없이 바라보네
殘紅林下向餘枝 수풀에 비낀 잔양 남은 가지 비추는걸
발급자 홍재우는 자는 경연(景淵), 본관은 남양(南陽), 부친은 홍영섭(洪英燮)이다. 1840년(헌종 6) 경자 식년시 진사 1등 3위로 입격하였고, 음직으로 가평군수(加平郡守)‧강릉부사(江陵府使)‧의성현령(義城縣令)‧삼가현감(三嘉縣監) 등을 역임한 이력이 있다. 특히 『강릉부사선생안(江陵府使先生案)』에 따르면 1861년 8월 8일 가평군수에서 이곳으로 부임한 뒤부터 1863년 7월에 의성현령으로 근무지를 옮기기 전까지 강릉부사로 재직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피봉에 명기된 ‘선각’이라는 명칭을 통해 이 간찰이 발급된 해 역시 강릉부사 재직 당시였음을 알 수 있다. 피봉에 명기된 ‘선각’은 명선각을 가리킨다. 기록에 따르면,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소재의 군선강(群仙江) 하구 해령산(봉화산) 북쪽 낙맥에 ‘강릉의 삼문(三門) 가운데 하나인 명선문(溟仙門)이 있었다’고 하고, 현재도 이곳에 강릉부사를 역임한 이집두(李集斗, 1744~1820)의 필적으로 알려진 바위글씨가 남아있으므로 이곳에 소재했던 누각이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현존하지 않고 있다. 또한 1855년에서 1858년까지 강릉부사를 역임한 류후조(柳厚祚, 1798~1876)가 재직 당시인 1857년에 작성한 「묘산상촌향약절목(茆山上村鄕約節目)」 성책에 “知府 豊山 柳厚祚 書于溟仙閣”이라고 묵서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따라서 ‘명선각’은 역대 강릉부사들이 거주하거나 집무를 보던 곳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 · 『承政院日記』 『江陵府使先生案』(국립중앙도서관[古2196-1]) 국토지리정보원,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진한엠앤비, 2015(국토지리정보원 사이트 pdf) 임호민, 「조선조 명문가의 재도약 과정과 향촌사회에서의 역할에 대한 고찰 -강릉거주 안동권씨 청풍당淸風堂 가문을 중심으로-」, 『강원사학』39(강원사학회), 2022 https://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1064597 (강원도민일보 기사 “명선문” 검색) https://hanauction.com/htm/off_auction_read.htm?id=53570&off_id=135&page=1&ac_num=24 (한옥션 “묘산상촌향약절목” 검색)
참고자료
원문
繁陰漲綠 雨意方濃 際爲懷仰 纔迎三愚 又逢令從氏 次第承聞近節 繼荷此訊 今日可神會也 其所慰浣 當如何 仍審候居珍穆 尤所願言 愚狀病擾 無足道 廣陵之觀 屬之家兒 非此身所管 而日前鏡湖之行 兒示其詩 故不禁老夫之興 猝有是成 可謂狂叫也 要供一噱 玆以錄呈 以備覆瓿 如何 若得從近枉顧 則何幸何幸 懸榻將掃塵而解矣 餘不備謝狀式 卽 洪在愚 拜
宿緣鏡浦已多時 今許諸君摠不期 過境幾斟三斗酒 名樓尙負一篇詩 眼前湖海難相辨 去後桑田有孰知 白髮如吾空悵望 殘紅林下向餘枝
竹軒 回展 仙閣 謝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