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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년(1859년 이후) 윤치용 간찰(尹致容 簡札)
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6_01_A00075_001
- ㆍ입수처
- 안동권씨 청풍당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미상년(1859년 이후) 윤치용 간찰 / 尹致容 簡札
- ㆍ발급자
-
윤치용(記尹致容)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 ㆍ형태정보
-
점수:크기: 27.8 × 41.7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미상년(1859년 이후, 가을경으로 추정) 즉일에 기하(記下) 윤치용(尹致容, 1798~?)이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 ㆍ수장고
- 이름: 서가위치: 단위치:
해제
미상년(1859년 이후, 가을경으로 추정) 즉일에 기하(記下) 윤치용(尹致容, 1798~?)이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이다. 발급일자는 ‘卽日’이라고 하여 상대에게 편지를 받은 당일에 곧바로 보냈음을 알 수 있고, 발급자는 상대에 대해 자신을 ‘記下’라고 표현하여 평교간으로 어느 정도 안면이 있던 사이로 추정된다. 피봉은 별도의 단봉으로, 전면에 기록된 ‘本倅 候狀’ 및 발급자의 이력을 통해 당시 강릉부사에 재직 중인 상황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수신자는 ‘梧竹軒 靜座下【권ᄉᆡᆼ원ᄃᆡᆨ】’이라는 기록을 통해 청풍당 안동권씨 문중에 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발급자와 비슷한 연배의 인물로 죽암(竹巖) 권계학(權啓學, 1716~1788)의 후손인 사죽당(思竹堂) 권박(權樸, 1773~?)의 아랫대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권박은 강릉에 거주하면서 생원시에 입격한 이력이 있으므로 ‘권생원댁’은 이 집안의 일원을 나타낸 말로 추정된다.
오래 격조하여 서운하다고 하면서, 짙은 가을에 고요히 기거하는 상대의 안부가 좋은지 물었다. 그리고 온 들에 곡식이 풍요로워 백성들이 기뻐하는데 난간에 기대어 그런 풍경을 바라보니 이것이 “거의 쾌활한 해라고 한다.[幾誦快活年]”고 하는 구절과 같은 상황이 아니겠냐고 언급하였다. 자신은 바다와 산의 승경지를 마음 가는 대로 다니면서 적막하고 답답하던 마음을 풀었다가, 다시 돌아온 뒤에 공무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순찰사가 순부(巡部)하는 첫 번째 읍이 되어 여가 없이 바삐 지내는데, 관가의 주방도 텅 비어 순찰사의 지공에 대책이 없고, 특히 과실 같은 따위는 난감한 점이 있다고 하였다. 이에 품질이 크고 맛이 좋은 감은 상대 측 마을만한 곳이 없다고 들었는데, 혹 크기가 크고 붉은 수시(水柿) 100과(顆)를 특별히 골라 보내 달라고 부탁하면서, 비록 5,60개라도 이달 26일이나 27일까지 보내주고, 이와 함께 계수나무 가지 서너 묶음도 함께 힘을 써서 도와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렇게 해 주면 나중에 보답을 할 것이라고 하였다.
관할 구역의 승경지를 유람하고, 부서(簿書)에 주묵(朱墨)을 찍어 처리하는 행정업무, 순찰사의 순부(巡部)에 대응하는 모습 등의 내용을 통해 당시 지역 수령의 일상이나 행위의 한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관아에 물력이 부족할 경우 친분이 있는 일반 사인에게 물품을 요구하고 이에 대해 보답을 하는 관행도 함께 엿볼 수 있다. 본문에서 언급된 ‘모과지보(木瓜之報)’는 『시경』 「위풍(衛風)‧모과(木瓜)」 편에서 유래한 말로 상대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이른다. ‘수시(水柿)’는 홍시의 일종으로 보이고, 원문의 ‘계림(桂林)’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혹 ‘계지(桂枝)’ 또는 ‘계피(桂皮)’의 오기일 가능성도 있다. 아마 홍시와 계피로 수정과와 같은 음식물을 만들기 위해 요구한 것으로 추정된다. 발급자 윤치용은 자는 대수(大受), 본관은 해평(海平), 부는 윤경렬(尹慶烈)이다. 1822년 식년시 진사 2등으로 입격하였고, 음직으로 승지‧여주목사‧나주목사‧강릉부사‧광주판관‧영변부사 등을 역임했다. 『강릉부사선생안(江陵府使先生案)』에 따르면 그는 기미년(1859) 봄에 부임하였고, 재임 당시의 치적을 통해 ‘교화로 다스려 이민들이 복종하였고, 정사는 고르고 송사는 간이하였다.[以化爲治 吏民畏服 政平訟簡]’는 감사의 포제(褒題)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 · 『承政院日記』 『江陵府使先生案』 (국립중앙도서관[古2196-1]) 임호민, 「조선조 명문가의 재도약 과정과 향촌사회에서의 역할에 대한 고찰 -강릉거주 안동권씨 청풍당淸風堂 가문을 중심으로-」, 『강원사학』39(강원사학회), 2022
참고자료
원문
稍阻悵仰 謹詢秋陰 靜候淸重 田野穰穰 民物欣欣 倚檻觀稼 幾誦快活年之句否 溸仰且禱 記下 海嶽風烟 隨意領略 寂菀之餘 頓開茅塞 而歸有餘戀 朱墨簿書 依舊亂心 重以巡部之初一入邑 餘日無多 窘跲忙迫 亦甚悶然 官廚如洗 支供無策 如果實之屬 難得可堪 第聞柿子之品大味佳 無如貴村 幸以水柿之體大臉紅者百顆 別擇以惠 雖五六十箇 趁今卄六七 竝與桂林數三朶 出力 相助否耶 第當有木瓜之報耳 餘留拜展 不備禮 卽日 記下 尹致容 拜
梧竹軒 靜座下【권ᄉᆡᆼ원ᄃᆡᆨ】 本倅候狀 [着圖書] 省式謹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