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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1966년 박증혁 외 간찰첩(朴曾赫 외 簡札帖)
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4_01_A01083_001
- ㆍ입수처
- 창녕조씨 명숙공종가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906/1966년 박증혁 외 간찰첩 / 朴曾赫 외 簡札帖
- ㆍ발급자
-
박증혁 외(朴曾赫 외)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 ㆍ형태정보
-
점수: 40크기: 29.5 × 18.5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병오년에 집안의 궤에서 발견한 40여 장의 간찰을 첩으로 만들어 후세에 참고하도록 하였음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율곡연구원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 ㆍ수장고
- 이름: 서가위치: 단위치:
해제
낱장의 간찰 수편을 모아 첩으로 제작한 간독첩이다. 필사본 80면 1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표제는 간찰집을 의미하는 ‘簡集’이고, 수록된 간찰은 모두 33편(장)이며, 호접장의 형태로 장정되어 있다.
발급인으로 기재된 인물은 박증혁(朴曾赫, 1850~?), 박형실(朴馨實), 박원동(朴元東)이고, 수급자 또는 이 간독첩의 제작자 집안과는 사돈 또는 인친(姻親)의 관계로 파악된다. 박증혁은 자세한 이력은 미상이나, 원주역사박물관 소장 <1867년 박규환(朴奎煥) 준호구(準戶口)>에 당시 ‘18세’로 기재되어 있어서 생년을 1850년으로 유추할 수 있고, 부는 박규환, 모는 강릉김씨(江陵金氏), 처는 안동권씨(安東權氏)이며 본관은 강릉임을 알 수 있다. 또한 1905년 9월 1일 판임관(判任官) 순릉참봉(順陵參奉) 8등(八等)에 임명하는 관첩(官牒), 같은 해 10월 1일에 판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주임관(奏任官) 6등(六等)에 임명하는 관고(官誥)가 남아 있어 그의 관력을 유추할 수 있다.
박형실의 경우도 자세한 이력은 미상이나 박증혁과 같은 강릉 박씨의 일원으로 추정된다. 「대한제국관보」 1902년 8월 25일자 기사에 “安邊郡公立小學校副敎員崔達斌은 解任고 朴馨實노”라고 한 내용, 1903년 1월 13일자 기사에 “安邊郡公立小學校副敎員朴馨實은 解任고 吳衡魯로”라고 한 내용을 토대로 1902년부터 1903년 1월까지 안변군 공립소학교의 부교원을 역임한 이력 및 이와 관련하여 1902년 8월에 박형실을 동 학교 부교원으로 임명하기 위해 발급한 관첩 1건이 남아있어 한말‧근대시기 인물로도 추정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본 간독첩 내 수록된 박형실의 <계묘년 12월 서간>(8번 간찰)에 언급된 ‘국상[國哀普痛 臣民惟均]’을 토대로 살펴보면, ‘계묘년’을 1903년(고종40)으로 보면 이 해를 전후하여 국상이 난 사례를 찾을 수 없으나 1843년(헌종9)으로 본다면 헌종비 효현왕후(孝顯王后) 김씨의 상이 난 해이므로 헌종 대 인물로 보는 것이 유력하다. 박원동 역시 강릉 박씨의 일원으로 추정된다. 본 간독첩 내 22번째 간찰에서 발급자 성명을 “朴馨東”으로 쓴 것이 발견되는데, ‘東’은 ‘實’의 오기이긴 하나 어쩌면 박원동과 박형실이 동일인물이거나 형제였을 가능성도 시사한다.
또한 이 간찰의 수급자 및 간독첩의 제작자에 관한 정확한 정보는 미상이지만, 수록 간찰 가운데 기재된 ‘瞻望蕙山’(9번 간찰), ‘蕙音墜案’(30번 간찰)과 같은 용어로 미루어보면 주 수급자는 이 간독첩의 원소상처인 강릉 혜재(蕙齋) 창녕조씨 가문의 일원으로 파악된다. 첫 면(표지)에 묵서된 표제의 우측에 간기(刊記)가 기록되어 있는데, “병오년 3월 13일에 문서 상자 안에 보관된 여러 간독들을 두루 열람하다가 박 교관(朴敎官)의 필법집(筆法集)을 발견하였기에, 이를 성편(成篇)하여 후인들이 초법(草法)을 관찰하고 문리(文理)를 완미하는 자료로 삼았다.[丙午 窉月 十三日 遍閱篋中諸牘 見朴敎官翰華筆法集 而成篇以資後人觀草 文理玩美]”라고 하였다. 성편 된 일부 종이의 재질 등으로 판단하면, ‘병오년’은 최소한 1906년이거나 1966년일 가능성도 있다. 이를 통해 이 간독첩의 제작시기와 제책 의도를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박교관’을 ‘박증혁’으로 볼 수는 있어도 ‘박형실‧박원동’과 시기상 동일 인물로 보기 어려운 면이 있다. 이는 간찰의 내용을 살펴보아도 언급되는 대상 인물들에 차이가 있는데, 예컨대 24번 <정미년 박증혁 간찰>과 25번 <정미년 박원동 간찰>은 같은 ‘정미년’에 발급되었고, 내용에서도 ‘아내의 상’이나 ‘해산한 갓난아이’를 언급한 면에서 같은 시기로 보이는 면이 있다. 하지만 자세히 확인하면 전자는 상대의 아내 상을 언급하고 자신의 딸이 상대의 며느리로 간 상황에서 손자를 본 일을 언급한 것이지만, 후자는 자신의 누이가 상대의 아내로서 사망하여 어미 없이 커야 할 갓난 조카를 언급하고 있으므로 각각 대상이 다르고, 따라서 ‘정미년’ 역시 같은 연도로 보기 어렵다. 이 간독첩의 제작자가 박증혁과 박형실 등을 동일하게 ‘박교관’으로 보고 한데 엮은 오류가 아닐까 추정되나, 관련 족보나 자료를 추가적으로 확보하여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박형실‧박원동은 스스로 ‘사생(査生)’을 칭할 때는 자신의 누이를 며느리로 맞아드린 사돈어른이 수급자로서 상대의 양친과 아들(매부) 내외의 안부 및 자신의 누이를 ‘令婦妹弟’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고, ‘부제(婦弟)’로 칭했을 때에는 자신의 누이를 아내로 맞아드린 매부가 수급자로서 상대의 층시(層侍, 조부 대와 부모 대를 병칭) 및 아들(조카)의 안부를 묻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매부가 선부군(사돈어른) 상을 당한 병오년(1846)과 조모상을 당한 정미년(1847) 이후로는 ‘사생’이라는 명칭은 사라지고 모두 ‘부제’만을 칭하면서 조부-모친-(상대)-아들의 순서대로 안부를 묻고 있는 모습도 확인된다.
이 외에도, 헌종 대 인물로 추정되는 박형실의 간찰 일부가 근대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줄 노트(또는 편지지)에 기록된 점, 군데군데 글씨를 연습을 위한 흔적이 있다는 점, 전반적으로 서체가 비슷하다는 점, 간혹 오자로 추정되는 글자가 발견되는 점 등의 특징들을 통해, 간기에서 밝힌 이른바 ‘박교관의 필첩’ 내용을 이 간독첩의 제작자가 낱장에 초록(抄錄)‧필사한 뒤 나중에 성편한 일종의 초본(抄本)일 가능성도 시사한다.
원문
簡集【丙午 窉月 十三日 遍閱篋中諸牘 見朴敎官翰華筆法集 而成篇以資後人觀草 文理玩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