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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4_01_A00403_001
- ㆍ입수처
- 창녕조씨 명숙공종가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875년 이하응 간찰 / 李昰應 簡札
- ㆍ발급자
-
이하응(李昰應, 1820~1898, 조선, 개인)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신좌모(申佐模, 1799~1877, 조선, 개인)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1875년 8월 22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澹人先生法鑒八月卄二日
- ㆍ형태정보
-
점수: 4크기: 22.7 × 12.5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미상년(1874~1876 추정)에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담인(澹人) 신좌모(申佐模, 1799~1877)에게 보낸 서양선의 출몰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전하는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율곡연구원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미상년(1874~1876년 추정)에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담인(澹人) 신좌모(申佐模, 1799~1877)에게 보낸 서양선의 출몰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전하는 간찰이다. 간찰의 수신인 신좌모는 본관은 고령(高靈), 자 좌인(左人), 호 담인(澹人)이다. 조부는 신지권(申持權)이고, 부친은 증이조참판 신헌록(申憲祿)이며, 모친은 안동김씨 김종후(金宗厚)의 딸이다. 흥선대원군 간찰에서는 담인(澹人) 또는 담인(淡人)이라 호칭하고 있어 신좌모임을 확인할 수 있다.
서두에서 申佐模의 7월 그믐과 8월 초 편지를 인편을 통해서 받았다고 하였다. 이 두 편지는 澹人集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 자신이 서울에 온 이후로 모든 일이 순조롭지 않다고 하면서 무력감을 표현하였고, 오직 믿는 것은 하늘뿐이라고 하면서 겹겹이 낀 안개도 결국에 일소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하였다. 현재 異樣船이 또 왔는데 廟堂에서는 山東賊처럼 간주하여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로 인한 물가 앙등 문제도 아울러 언급하였다. 上疏 주동자 4인(奉還疏의 疏頭인 崔華植․趙忠植․曺秉萬․任度準이다. 이들은 당초 犯上不道의 죄목으로 西小門 밖에서 處斬될 예정이었으나 상경한 대원군의 救命으로 減死를 받고 遠惡島에 圍籬安置되었다.(承政院日記 高宗 12年 6月 24日, 羅巖隨錄 第2冊 前縣監金炳昱疏草))이 목숨을 구하기는 하였으나 孤島에 안치되니 안타깝다고 하였다. 그 당시 判義禁府事는 穉岡(李承輔) 대감인데 거듭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 끝내 엄한 견책을 받았다고 하였다.(李承輔(1814~1881)가 疏頭 4인을 處斬하라는 고종의 명에 대해 判義禁으로서 절차상 이의를 제기하였다가, 전 장령 申泰寬(1839~?)에게 대원군의 奉還을 주도하는 세력의 領袖라는 공박을 당하고 李東榮이 다시 상소하자 결국 竄配된 일을 가리킨다.(承政院日記 高宗 12年 6月 21日, 7月 9日, 8月 12日; 石山遺稿 「年譜」)) 申泰觀의 上疏는 반대파를 일망타진하려는 것이라고 하였다. 대원군은 자신 한 사람의 거취 때문에 남에게 해가 미치는 것에 개탄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申佐模가 상경하는 것은 조섭에 지장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이미 낙향한 상황이니 다시 도성으로 향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더구나 식비 등 물가가 날로 오르고 있다고 하니 가난한 선비가 행차할 시기가 아니라 하면서, 적절한 때를 기다리라고 당부하였다.
담인집(澹人集 卷14 書, 「上大老書 乙亥九月」)에 실려 있는 이 간찰에 대한 신좌모는 답신에서, 海上의 이양선이 멀리 물러가 인심이 안정되고 서울에 米商이 몰려들어 穀價가 안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하면서, 그 사실 여부는 모르겠지만 크게 기쁘다고 하였다. 그리고 현재 모든 일은 대원군의 身上에 달려 있으니 건강을 잘 챙기시라고 하였다.
원문
(1) 淡人先生道場文座 便至 拜讀先椷 此是七晦八初之兩度也 備承愛注 藉聞體宇之衰敗 日去益甚 如水漬紙 此爲應然之事 離弦之失 大是怊悵 拜審近候 乍凉乍熱 朝晝異氣 人病頗多 老弱尤危 此際文體淸鬯 區區遠溯 記下生 一自入闉之后 凡
(2) 百事 無百呼一諾 無奈 頹唐無力 而惟恃者天也 百川橫流 竟歸於海 重霧障翳 終消於陽 此爲理之然矣 目下適有洋舶之又來 廟堂之上 視之若山東盜而無懼 人䚹日熾 洶洶遑遑 市直刁騰 百種絶矣 宗社綴旒 生靈溝壑 其勢必至 天若有應陰隲 則自有廓揮乾斷之日矣 以是爲祝 四儒活命 非爲四人而然矣 實爲
(3) 聖聽之光而然者也 幸賴天力 雖爲傅生 孤島海面 孑孑跧伏 令人氣短 而其時判金吾 卽穉岡台 再遭人言 竟被嚴譴 此爲此台之地 我福曰 錦上添花 又以聖聽之累 實難言之 第一從疏中瞬吠二字 誤看之餘習云云 網打一邊 無復餘地 以我一身去就 害及諸人 自顧身分 不勝旤{虛+无}而已 言之何益 此時
(4) 御者上洛 非但有妨調將 旣辭都門 而歸農閒養之地 實不可復向闤闠 十分諒之 且聞烟價日高 實非寒士作行之時也 又爲十分諒之 以待其時如何 萬望萬望 卽請道安 諸希珍攝 不備 朗照 右奉淡人先生法鑒 八月卄二日雲下生仰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