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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이하응 간찰(李昰應 簡札)
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4_01_A00402_001
- ㆍ입수처
- 창녕조씨 명숙공종가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875년 이하응 간찰 / 李昰應 簡札
- ㆍ발급자
-
이하응(李昰應, 1820~1898, 조선, 개인)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신좌모(申佐模, 1799~1877, 조선, 개인)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九月卄一日
- ㆍ형태정보
-
점수: 2크기: 22.8 × 12.3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율곡연구원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 ㆍ수장고
- 이름: 서가위치: 단위치:
해제
[1874~1876] 9월 21일에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신좌모(申佐模, 1799~1877)에게 보내는 간찰이다. 주요 내용은 시사(時事)에 대한 걱정과 절대로 시사에 대해러 언급하지 말라는 당부를 적은 것이다. 창녕조씨 명숙공종가(命肅公宗家) 소장 간찰 중 흥선대원군이 신좌모에게 보낸 간찰은 총 45점인데, 1872년에 참판 최익현(崔益鉉)의 상소로 인해서 이 때는 대원군이 경기도 양주(楊州) 직곡(直谷)에 은거하고 있던 시기이다. 신좌모의 자는 좌인(左人), 호는 담인(澹人),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1827년(순조 27) 사마시에 합격하고, 1835년(헌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원릉별검(元陵別檢)·성균관전적·병조정랑·종부시정 등을 역임하였고,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실록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849년에는 사헌부집의를 거쳐 사간원사간 등을 지내고, 1855년(철종 6) 진위진향사(進慰進香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담인집(澹人集)』이 있으며, 이 문집에 이하응에게 보낸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신좌모는 대원군 집권기에 이조참판,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할 정도로 대원군에게 신임을 받았던 친대원군계 근기남인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서두에서는 먼저 申佐模의 아들 申昇求의 향시 입격 소식과 申佐模가 점점 노쇠해 가는 것에 대한 언급이 있다. 정국에 대해 말을 아끼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고 하였다. 珍山의 유배객과 관련된 일은 기뻐할 만한 것이고 서로 위로할 것은 없다고 하였다. 이것은 珍山郡에 유배된 李承輔(1814~1881)의 일을 가리킨다.(承政院日記 高宗 12年 8月 13日; 石山遺稿 「年譜」) 이어 네 섬에 安置된 疏頭의 일(崔華植은 羅州牧 智島에, 趙忠植은 靈光郡 荏子島에, 曺秉萬은 康津縣 古今島에, 任度準은 興陽縣 鹿島에 각각 圍籬安置되었다.(承政院日記 高宗 12年 6月 24日)을 언급하면서 또한 否運이라고 하였다. 시국이 혼란하고 변방의 흔단이 이미 생긴 것에 대해 우려하였다. 대원군 자신은 進退에 근심이 있으니 그저 鴻門宴에서 장막 뒤에 있던 樊噲처럼 한탄할 따름이라고 하였다. 차후 편지에서 시국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을 明哲保身의 방법으로 삼을 것이라고 하였다.
원문
(1)淡人先生文座 秋事已晩 楓菊自落 此時懷仰正在 卽於便至 拜讀先椷 備承情注 藉悉胤君之解額 拜審台文候漸衰 如下山之勢 一爲應然之事 言之何益 記下卽一無口瓠瓜 理遣餘生 如心上定之 此 外他事 何須指言 珍山客事 果是樹立也 實爲可賀 不以相慰也 四島人六學
(2)士事 此亦否運也 亦言何益 世事紛競 邊釁已啓 此將奈何 區區一心 進退有憂 只自鴻門帳後之歎而已 此後尺券 切勿以時事提云 爲明哲之道也 十分諒之諒之 餘擾甚都擱 統希道安 更請珍攝 不備 照亮 九月卄一日雲下生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