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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3_01_A00809_001
- ㆍ입수처
- 전주이씨 선교장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증빙류-호적(戶籍)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798년 이면조 호구단자 / 李冕朝 戶口單子
- ㆍ발급자
-
이면조(李冕朝, 1798~1832)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1798년 1월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嘉慶3年(1798) 正月 日
- ㆍ형태정보
-
점수: 1크기: 40.8 × 50.1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1798년 이면조(李冕朝, 1773~1832)가 강릉부에 제출한 호구단자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율곡국학진흥원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1798년(정조22) 무오식년을 맞아 이면조(李冕朝, 1773~1832)가 주호(主戶)로서 주관하여 강릉부에 제출하여 확인 후 환급받은 호구단자이다. 이 문서는 본질적으로는 호구단자이나 그 양식에 있어 준호구의 특성이 많이 혼재되어 있다. 우선 이면조 호의 가족 구성원과 주호의 4조 기록이 각각의 줄에 열서(列書)되고 있으며, 주호 기록의 시작 부분에 주묵으로 점을 찍어 확인하고 있다는 점 등이 이 문서가 호구단자로 제출되었다가 돌려받은 문서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준호구로 볼 수 있는 양식도 동시에 나타난다. 첫 줄의 “가경3년 정월일 강릉부(嘉慶三年 正月日 江陵府)”라는 기록부터 준호구의 서식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문서의 본문이 “고을묘성적호구장내(考乙卯成籍戶口帳內)”로 시작해서 “등을묘호구상준자(等乙卯戶口相準者)”로 끝나고 있는데 이 역시 준호구의 서식과 거의 일치한다. 다만 시작 부분에 해당 식년의 간지인 “무오(戊午)”를 써야 하는 것을 지난 식년의 간지인 “을묘(乙卯)”로 기록하였다. 문서의 끝부분에는 “대도호부(大都護府)”라고 담당관을 기록하고 그 아래에 해당 관의 착압(着押)을 각압(刻押)하였다. 문서의 앞부분에는 관인(官印) 1과(顆)를 날인하였고, 문서의 뒷부분에는 주협개인(周挾改印)을 기울여 날인하였으며, 문서의 중간 하단에 주묵으로 “준(准)”이라 기록하였다. 해당 관의 착압 등은 제출한 문서의 진정성을 관에서 인정·확인하였음을 의미한다. 주협개인은 문서의 내용 중 삭제하거나(周), 끼워넣거나(挾), 고친(改) 글자의 수를 나타내고, 없을 경우 “주협무개인(周挾無改印)”을 날인하도록 하였는데, 이 문서에서는 “주협무개인(周挾無改印)”을 상투적으로 날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문서를 살펴보면 통수의 이름과 노비질에 끼워넣거나 수정한 부분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면조가 이 호구문서를 작성한 시기는 1798년 정월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8세기 중엽 이후 각 읍의 호적작성은 이미 식년 전해 하반기면 시작되었다. 따라서 식년 정월로 기록된 호구단자는 실제로는 식년 전해에 작성되는 경우가 많이 존재했다. 이면조 호는 현재 선교장이 소재한 강릉시 운정동인 북면(北面) 정동(丁洞) 조산리(助山里)에 소재했다. 제6통 제2호로 편제되었는데, 통수(統首)는 오귀리금(吳貴里金)이란 인물이었다. 그 동생인 이승조(李昇朝, 1776~1804) 호가 이어지는 제6통 제3호에 편제되어 있었음을 같은 식년 이승조 호구단자(A003_01_A00807_001)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이 호구단자에 따르면 이면조 호는 5구의 가족구성원과 60구의 노비로 구성되어 있다. 가족구성원은 이면조와 처 강릉박씨 내외, 조모 원주원씨와 모 안동권씨, 그리고 이번 식년부터 새로 등장한 동생 이항조(李恒朝, 1786~1822)이다. 조모와 모의 앞에 “봉(奉)”자를 써서 직접 모시고 거주하고 있음을 나타냈으며, 동생 항조 앞에는 “솔(率)”자를 써서 실제 데리고 살고 있음을 나타냈다. 주호인 이면조는 익조(益朝)에서 이름을 바꾼 사실이 나타나 있으며, 26세의 나이로 유학(幼學)의 직역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부 이시춘(李時春, 1736~1785)의 직역은 종5품 상계의 품계인 통덕랑(通德郞)으로 나타나며, 조부 이내번(李乃蕃, 1703~1781)은 종2품 하계의 가선대부 품계와 역시 종2품인 동지중추부사의 관직이 확인된다. 증조 이주화는 종2품 가선대부 이조참판의 관직과 그 겸직으로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와 오위도총부 부총관(副摠管)의 관직에 추증되었다. 외조 권세달(權世達)의 직역은 정3품 당상관의 무신 품계인 절충장군과 역시 정3품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나타난다. 본관은 안동이다. 처 강릉박씨는 이익조보다 4세가 많은 30세의 나이인데 그 4조 기록은 누락되어 있다. 조모 원주원씨는 103의 고령으로 “정부인(貞夫人)”이라는 2품관의 아내에게 내리는 종부직(從夫職)이 기록되어 있다. 모 안동권씨는 56세의 나이로 나타난다. 동생 이항조는 13세의 나이로 처음 등장하는데, 역을 지지 않는 어린 연령 구성원에 대한 호적 누락이 일반적으로 용인되어지던 관행에 따라 관례적으로 누락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이 호구단자의 노비질에는 총 60구의 노비가 등장하는데, 그 중 노는 23구이며, 나머지 37구가 비로 확인된다. 60구의 노비는 지난 식년에 비해 5구가 증가한 수로, 이전 식년 55구의 노비 중 10구의 기록이 사라졌으나, 15구의 새로운 노비가 등장함에 따른 결과이다. 이러한 노비 보유의 급격한 변동은 부분적으로 사망과 출생 및 매득의 사유가 반영된 것이나, 다른 경우는 정확한 사유를 확인하기 어렵다. 인위적인 누락과 등재가 확인되기도 하는데, 1774년 호구단자에서 이미 경인년인 1770년에 사망한 것으로 확인된 비 정금(丁今)이 다시 등장하고, 지난 식년에 사망한 노 귀태(貴太)가 다시 생존한 것으로 기록되는 등의 사례가 그러하다. 노비질에 수록된 60구의 노비에는 각각 2구의 도망노비와 사망노비가 포함되어 있다. 이 가운데 각 1구의 도망노비와 사망노비는 이전 식년에도 동일한 상태를 보여주고 있었지만, 나머지 각 2구의 노비들은 그 사이에 도망하고, 사망한 노비이다. 노비질에서 확인할 수 있는 매득 노비는 5구인데, 이번 호구단자에서 새로 등장한 매득 노비는 2구이다. 1776년과 1779년에 태어난 20대의 젊은 노(奴)로, 노동력의 필요에 의해 새로 매득한 노비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노비 가운데는 깃득(衿得) 비 득녀(得女)를 확인할 수 있다. 득녀의 경우 1792년 호구단자부터 이면조의 처 강릉박씨와 함께 등장하여 강릉박씨가 혼인하면서 몫으로 받아 온 노비로 추정된다.
원문
嘉慶三年 正月 日江陵府
考乙卯成籍戶口帳內[官印]丁洞助山里第六統統首吳貴里金統內
第二戶幼學李益朝年改冕朝年二十六癸巳本全州
父通德郞 時春
祖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乃蕃
曾祖 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冑華
外祖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權世達本安東
妻朴氏齡三十己丑籍江陵
奉祖母貞夫人元氏齡一百三丙子籍原州
奉母權氏齡五十六癸亥籍安東
率弟恒朝年十三丙午 [準]
奴癸云年癸酉逃買得婢占德年戊申同婢一生奴卜三年辛未婢金禮年
辛卯婢丁今年戊午同婢一生奴乞應年癸未買得婢分梅年庚戌一生
婢發以每年癸未二生奴無邑同年戊子買得婢年伊年庚戌一生奴
介金年癸未二生奴莫金年辛卯婢初丁一生婢乙分年乙酉同婢三生婢
成今年戊申五生奴甲寅年甲寅婢丹伊年一生奴德山年丁丑三生奴貴
太年壬午四生婢貴暹年戊子婢三暹一生婢戊節年戊子同婢一生婢
占丹年丁未婢一禮三生奴千石故婢月丹一生婢五月年丙申同婢一生婢
丙暹年丙辰婢㐥禮年甲子婢占六生奴鳳億年庚午一生婢鳳暹
年辛亥三生金香年丙子鳳暹三生奴太三年癸未二生婢太分年戊寅
四生婢順每年辛卯五生婢順節故太分一生婢丙月年丙申婢今香三生婢
願暹年乙巳四生婢五暹年壬子五生婢分暹年甲寅六生奴冠玉年乙卯
婢初分二生婢巳分年庚戌同婢一生奴崔同年癸未[周挾改印]二生奴得才年乙未三
生婢得每年丙申婢甘德一生婢乙每年庚寅婢發年甲子一生婢
壬德年壬辰二生生壬丹年丙申三生奴漢吉年戊戌四生婢莫娘年己酉
婢吉每年辛未同婢一生奴申得年辛卯婢莫暹年庚辰逃買得婢貴分
一生奴願福年丁未二生婢卜禮年辛亥買得婢一恩禮一生奴後種年壬子發
以梅一生婢癸分年癸卯二生奴壬山年壬子貴暹一生婢翠分年己酉二生
奴順才年癸丑衿得婢得女年乙未買得奴道也之年丙申買得奴順奉年
年己亥等乙卯戶口相準者
大都護府[着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