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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5년 최치동 소지(崔致東 所志)
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3_01_A00801_001
- ㆍ입수처
- 전주이씨 선교장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소차계장류-소지(所志)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745년 최치동 소지 / 崔致東 所志
- ㆍ발급자
-
최치동(崔致東)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강릉부사(江陵府使)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1745년 6월 25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乙丑六月卄五
- ㆍ형태정보
-
점수: 1크기: 50.8 × 30.6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1745년(영조 21) 5월에 화민(化民) 최치동(崔致東)이 가묘(家廟)에서 제멋대로 종조부모의 위패를 빼내간 종조부의 사위 김우택(金虞澤)을 벌줄 것을 강릉부에 청원한 소지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율곡연구원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1745년(영조 21) 5월에 화민(化民) 최치동(崔致東)이 가묘(家廟)에서 제멋대로 종조부모의 위패를 빼내간 종조부의 사위 김우택(金虞澤)을 벌줄 것을 강릉부에 청원한 소지이다. 화민(化民)은 교화를 입고 있는 백성이란 뜻으로, 양반이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의 수령에게 정소(呈訴)할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본 소지의 관련문서는 1756년 1월 20일에 최치동이 이내번(李乃蕃, 1703~1781)에게 17냥을 받고 위 제위전(祭位田)을 매도하면서 발급해 준 ‘A003_01_A00254_001’이다. 이를 통해 위 소송에서 승소한 최치동이 이내번에게 제위전을 매도하면서 위 관련문서와 함께 위 밭의 증빙문서로서 본 소지를 이내번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전율통보』 등의 법전에는 ‘과장(科場)에서 사대부의 첩자(妾子)가 함부로 유학이라 칭한 자는 군보(軍保)로 강정(降定)한다’는 조목 외에는 이와 관련된 조항이 있지 않아, 위의 사유로 군보로 강정이 되는지는 알 수 없다.
최치동의 종조부는 딸만 있고 계자(系子)가 없었으나 가문이 쇠약하고 박복하여 대를 이을 자를 얻지 못하였다가 최치동의 아버지가 어린 나이일 때 계후로 지목하여 거둬 기르던 중 최치동의 숙부가 결혼 전에 요절하였다. 이에 최치동의 조부가 그의 부친을 다시 데리고 가 종조부는 계후를 얻지 못하고 밤낮으로 통탄하며 최치동 부친을 부르짖었으나 최치동의 집은 종가였기 때문에 그의 부친을 양자로 보낼 수 없었다. 결국 종조부는 자기 부부의 위패를 반차(班次)에 따라 종가의 사당에 합부(合祔)하겠다고 말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내외 족속과 이웃 사람들이 모두 아는 내용이다. 갑인년(1734?) 2월에 종조부가 임종할 때 약간의 전답과 노비를 제위조(祭位條)로 떼어 최치동의 부친에게 지급한 뒤 그 나머지 재산을 세 딸과 사위에게 평균분급하였다. 그런데 재작년 8월 14일에 막내사위 김우택이 위의 제위조를 탐하여 최치동이 외출한 틈을 타 가묘에 돌입하여 종조부모의 위패를 빼내어 가지고 갔다. 이에 최치동은 김우택을 법정에 잡아들여 도리에 어긋하게 점유한 죄를 무겁게 다스리고, 강등하여 군보(軍保)의 역을 정할 것을 청원한 것이다. 이 소지를 접수한 강릉부사는 5월 27일에 ‘사실을 판단하기 위해 김우택을 잡아 오라’는 1차 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6월 25일에 ‘즉시 조사할 일이 있으니 유학 최주운(崔柱雲)을 급히 잡아오라’는 처분을 추가로 내린 뒤 7월 1일에 ‘(分財)문서 작성자를 잡아와 물으니 그의 필적이 확실하므로 (종조부) 최시운(崔時運) 생시에 분재한 문서가 이처럼 분명한 즉 김우택이 함부로 빼앗으려고 한 계책은 너무 비루하다...(위 제위조) 전답과 노비를 (최치동) 너에게 결급(決給)하니 나중에 혹여 다시 (피고가) 침탈하려고 하면 이 판결문을 관에 올려 변별할 것’이라는 최종처분을 내려주어 최치동이 승소하였다. 위 세 차례의 뎨김을 통해 최주운(崔柱雲)이 분재문서 작성자라는 것과 강릉부사가 이 소송을 판결하기까지의 과정을 유추해볼 수 있다. 또한 위 소지는 당시 계후자가 없는 경우에 자신의 제사(祭祀)에 대해 어떤 대책을 마련하였는지 그 방편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이다.
원문
化民崔致東[着名] 右謹言所志矣段 從祖父命道奇薄 只有女息 而無系子是乎矣 門衰祚薄 未得繼後之人乙仍于 矣父垂髫之時 指目繼後之言 而率養爲有如可 未及成長 而矣三寸叔父亦 未及成婚前夭死 故矣祖父還率矣父 則從祖父段 未得繼後之人 而晝夜含痛長呼矣父是乎矣 矣家旣是宗家 則決不可出繼是乎等以 從祖父常言宗家班祔之意 內外族屬及鄰里之人 衆所公知是如乎 甲寅年二月分 臨終之時 若干田民乙 除出祭位條 付給於矣父後 其餘田民乙 平均分給於三女婿處爲有如乎 上上年八月十四日良中 末女婿金虞澤 乘其矣身出他之時 突入矣家廟 從祖父母家廟乙 抽出持去之狀 雖是遐鄕人事 反不如編戶之人是乎所 貪其田民 而不顧義理 不勝痛惋兺不喩 元財主歸處之事乙 到今贅人虞澤 任意自專 如是濁亂爲乎所 極涉無據是乎等以 如許辭緣 略陳於城主明政之下爲去乎 各別參商敎是後 同金虞澤身乙 捉致法前 重治其非理橫占之罪是白遣 降定軍保之役 一以雪從祖父遺書 二以免無倫奪宗之弊爲只爲 行下向敎是事 城主處分 乙丑五月日 所志 <題辭>推卞次 捉來向事 卄七 行使[署押]
<背題>卽有査問事 幼學崔■柱雲身乙 星火捉來事 乙丑六月卄五 行使[署押] 狀者
文書筆執捉來問之 則其矣筆蹟的實無疑是如爲臥乎所 崔時運生時分財文卷 旣如是昭然 則其婿金遇澤之物 爭橫奪之計 太陋矣 已不足度道矣 同田民 汝矣處 專數決給 日後如或更侵是去等 以此呈官卞別向事 七月初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