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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ㆍ자료ID
- A003_01_A00072_001
- ㆍ입수처
- 전주이씨 선교장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미상년 김돈희 간찰 / 金敦熙 簡札
- ㆍ발급자
-
김돈희(金敦熙, 1871~1937)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이근우(李根宇, 1877~1938)
원문내용 鏡農先生前추정
- ㆍ지역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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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급지역수취지역
- ㆍ발급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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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 ㆍ형태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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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 1크기 24.8 × 34.5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인문판독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이 문서는 모년 모월 모일에 김돈희(金敦熙, 1871~1937)가 경농(鏡農) 이근우(李根宇, 1877~1938)에게 보낸 편지이다.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율곡연구원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이 문서는 모년 모월 모일에 김돈희(金敦熙, 1871~1937)가 경농(鏡農) 이근우(李根宇, 1877~1938)에게 보낸 편지이다. 금전 송부와 관련된 실무적 사정을 다루면서도, 문중 간 신뢰와 정서를 담고 있어 당대의 경제적·사회적 교류를 보여준다. 특히 송금이나 물품 전달이 지역 간 교통망과 인적 관계망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드러내어, 당시 재정 운영과 인적 유대의 방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김돈희(金敦熙, 1871~1937)는 본관 경주(慶州). 자는 공숙(公叔), 호는 성당(惺堂). 한말에 법부 주사와 검사를 거쳐 중추원 촉탁을 지냈다. 1919년 서화협회(書畫協會) 창립 때 13인의 발기인 중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으며, 1921년에는 제4대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23년의 제2회조선미술전람회(약칭 鮮展)부터는 서부(書部)의 심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글씨는 전(篆)·예(隷)·해(楷)·행(行)·초(草)의 오체(五體)를 모두 잘 썼으나, 특히 안진경(顔眞卿)과 황정견체(黃庭堅體)의 해서에 뛰어났다. 팔분체(八分體)의 오른쪽이 올라가는 예서에서 자유분방하고 변화가 많은 자신의 서품을 이룩하였으나, 격조면에서는 황정견체의 해서·행서에 미치지 못하였다. 서화협회전과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대표적인 작품들을 많이 출품하였으며, 과천의 「문간공한장석묘갈(文簡公韓章錫墓碣)」을 비롯하여 많은 금석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서의 연원」과 「서도연구의 요점」 등의 이론적 글을 통하여 서예전통의 계승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서법연구기관으로 ‘상서회(尙書會)’를 열어 후진을 양성하면서 당시 서예계의 대표자로서 많은 영향을 끼쳤으나, 훗날 그가 끼친 영향이 정통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었다는 비판도 받았다. 대표작으로 안진경체의 해서로 쓴 「출사표(出師表)」와 황정견체의 해서로 쓴 「장진주(將進酒)」 등이 있다.
이근우는 일제강점기 강원도 지역 유력자로 활동하였으며, 1900년대 초반 교육사업에 참여해 동진학교(東震學校) 설립 등 지역민 교육에 기여하였다. 이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어 관료 생활을 하였다.
편지의 내용은 수신자인 경농 선생이 금전을 보내준 데 대해 깊은 감사를 표하면서 시작된다. 발신자는 그 금전이 곧 송포(松浦)로 전달될 예정임을 밝히면서도, 이렇게 멀리까지 돈을 보내게 하는 것이 미안하고 불편하다는 심정을 덧붙였다. 이어 발신자는 상대방의 장구한 평안과 안부를 기원하며, 자신은 크게 길게 쓸 형편이 못 되어 이만 줄인다면서도 성심을 다해 예를 표한다.
제목 없음
李參議宅
惺弟拜啓 謹
伏承/ 惠送金 當傳于松浦/ 而若是專於遠/擲 還切未安 仍/此順候/久安
弟 金敦熙 再拜
鏡農先生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