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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ㆍ자료ID
- A003_01_A00038_001
- ㆍ입수처
- 전주이씨 선교장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미상년 정병조 간찰 / 鄭丙朝 簡札
- ㆍ발급자
-
정병조(鄭丙朝, 1863~1945)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이근우(李根宇, 1877~1938)
원문내용추정
- ㆍ지역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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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급지역 市內 都梁洞 一四四 鄭丙朝수취지역 市內 齋洞 百十番地 李根宇 殿
- ㆍ발급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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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월 14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十四日夕
- ㆍ형태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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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 1크기 25.8 × 14.3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인문판독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이 간찰은 모년 모월 14일 저녁에 정병조(鄭丙朝, 1863~1945)가 이근우(李根宇, 1877~1938)에게 근대기 사대부가 신의(信義)를 중시하며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 감격을 표한 간찰로, 가족 윤리와 도덕적 자각이 짙게 드러난 문서다.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율곡연구원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이 간찰은 모년 모월 14일 저녁에 정병조(鄭丙朝, 1863~1945)가 이근우(李根宇, 1877~1938)에게 근대기 사대부가 신의(信義)를 중시하며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 감격을 표한 간찰로, 가족 윤리와 도덕적 자각이 짙게 드러난 문서다.
발신자는 김진긍(金鎭兢)이라는 인물에게서 증서(證書)의 반환을 받았음을 보고하며, 그 의리와 신의에 깊이 감동한 심정을 토로하였다. 이 간찰은 근대기 조선 문인 사회에서 경제적 신뢰·인간적 도리·감정 표현의 문학적 양식이 어떻게 결합되었는지를 드러내는 사례다.
정병조는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관경(寬卿), 호는 규원(葵園)이다. 정만조(鄭萬朝)의 아우이다. 1882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894년에 동궁 시종관이 되었다. 1896년 명성황후 시해 때 탄핵을 받아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蝟島)로 옮겨졌다가, 1907년에 특사로 풀려났다. 그 뒤 중추원의 촉탁으로 『조선사(朝鮮史)』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글씨도 잘 썼다. 시문(詩文)에 뛰어나 『녹어산관집(漉魚山館集)』을 간행하였다.
이근우는 본관은 전주, 호는 경농(鏡農)이다. 강릉(江陵) 출신으로, 구한말·일제강점기의 관료이자 교육사업가로 활동하였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맡았으며, 강릉 선교장(船橋莊)을 기반으로 동진학교(東震學校)를 설립하는 등 지역 교육을 이끌었다.
내용을 살펴보면, 발신자는 오늘 아침 누군가가 와서 김진긍이 보낸 편지를 전했는데, 그 속에 증서의 반환 문서가 들어 있었다고 전한다. 이 일은 말세에 다시 보기 어려운 의리 있는 행위라며 놀라움과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그는 곧 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집안 모두가 그 덕을 칭송하며 문을 닫고 감사의 예를 올렸다고 적었다. 중반부에는 발신자의 감격과 신의에 대한 자각이 구체적으로 전개된다. 그는 세 아들을 불러 내가 이미 늙었으니, 너희 셋은 반드시 이 은혜에 보답할 길을 찾아야 한다고 일러주었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그러한 보답이 실제로는 어찌 쉽게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며, 인간사의 무상함과 은혜의 무게를 함께 느낀다. 편지의 후반부에서는 감정의 정리와 문학적 전환이 이루어진다. 발신자는 이 감격을 잊지 않기 위해 감히 시 한 수를 지어 두었다며 그 시를 형에게 보낸다고 말하며 편지를 마쳤다.
제목 없음
市內 都梁洞 一四四 鄭丙朝
市內 齋洞 百十番地 李根宇 殿
今早有人來 傳金鎭兢君書 書中有証書/之還投 此豈季世所可得之事耶 歸對家/人 說去闔門頌德 當復何如 弟 命三子曰 吾/已老無及 汝三人必圖萬一之報云云 而豈其易得/耶 玆庸志其不忘 有搆一詩 故第此呈/覽 一笑如何 幷希愛照 兼祈/日安
十四日夕 下末弟 丙朝 拜啓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