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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ㆍ자료ID
- A003_01_A00037_001
- ㆍ입수처
- 전주이씨 선교장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미상년 정병조 간찰 / 鄭丙朝 簡札
- ㆍ발급자
-
정병조(鄭丙朝, 1863~1945)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이근우(李根宇, 1877~1938)
원문내용추정
- ㆍ지역정보
-
발급지역수취지역
- ㆍ발급시기
-
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 ㆍ형태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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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 1크기 18.9 × 27.8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인문판독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이 편지는 모년 모월 모일에 정병조(鄭丙朝, 1863~1945)가 경농(鏡農) 이근우(李根宇, 1877~1938)에게 보낸 간찰로, 근대기 질병과 빈곤 속에서도 가족 간 의지와 생계의 어려움을 드러낸 간찰이다.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율곡연구원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이 편지는 모년 모월 모일에 정병조(鄭丙朝, 1863~1945)가 경농(鏡農) 이근우(李根宇, 1877~1938)에게 보낸 간찰로, 근대기 질병과 빈곤 속에서도 가족 간 의지와 생계의 어려움을 드러낸 간찰이다. 발신자는 병환으로 쓰러져 침상에 누운 상태에서, 약값과 인삼 구입비를 마련하지 못해 형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따라서 이 편지는 근대기 사대부 계층이 겪은 질병, 경제적 곤궁, 가족 간 구휼 관계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생활사 자료로 가치가 있다.
정병조는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관경(寬卿), 호는 규원(葵園)이다. 정만조(鄭萬朝)의 아우이다. 1882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894년에 동궁 시종관이 되었다. 1896년 명성황후 시해 때 탄핵을 받아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蝟島)로 옮겨졌다가, 1907년에 특사로 풀려났다. 그 뒤 중추원의 촉탁으로 『조선사(朝鮮史)』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글씨도 잘 썼다. 시문(詩文)에 뛰어나 『녹어산관집(漉魚山館集)』을 간행하였다.
이근우는 본관은 전주, 호는 경농(鏡農)이다. 강릉(江陵) 출신으로, 구한말·일제강점기의 관료이자 교육사업가로 활동하였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맡았으며, 강릉 선교장(船橋莊)을 기반으로 동진학교(東震學校)를 설립하는 등 지역 교육을 이끌었다.
내용을 살펴보면, 발신자는 먼저 며칠간 소식을 전하지 못해 근심이 쌓였다며 형의 안부를 묻는다. 형의 건강과 집안의 평안을 축원한 뒤, 자신은 독감에 걸려 3일째 침상에 누워 있고, 오한과 열이 교차하며 사지가 힘이 빠져 움직이지 못한다고 병세를 상세히 전한다. 의사가 몸이 심히 허약하여 보양이 필요하다고 진단했으나, 인삼을 달여 먹을 형편이 안 된다고 덧붙인다. 중반부에는 자신의 비극적 상황이 구체적으로 전개된다. 그는 세 아들이 모두 몇 해째 병으로 앓고 있고, 약값을 외상으로 쓴 곳이 여덟 군데에 달한다며 절망적인 형편을 토로한다. 더는 갚을 길이 없어 이젠 어디에도 손을 벌릴 수 없다고 하며, 이토록 비참한 처지로 전락한 것이 사람의 도리로서 참으로 부끄럽다고 말한다. 이어 혹시 남은 인삼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보내 달라고 간청하면서, 이러한 부탁조차 송구스럽다고 덧붙인다. 편지의 후반부에서는 자신의 부끄러움과 체념이 드러난다. 감히 입을 열어 형을 번거롭게 하고자 한 것이 아니나, 여러 번 궁리해도 다른 방도가 없었다고 자책하며, 이 사정을 듣고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럽다고 고백한다. 편지 끝에서는 며칠 전 지(池)자로 운을 맞추어 보낸 시 한 수를 함께 올리니, 웃으며 보아 달라고 덧붙여, 병중에도 문사로서의 자의식을 잃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제목 없음
鏡農令兄 惠升
肅 丙朝
數日之阻 已覺積懷 伏惟日來/令體祺萬勝 寶覃均吉 至爲/頌禱 弟 以毒感委席 今三日 而/寒熱不甚 但四肢疲軟 不可動作/ 醫言大虛 不盆注蔘 熟感亦難/除云 然三兒四年之病 藥價見督處/爲八處 更無一所以外上得之之道 弟之/身世 一切至此 百端貽惱 又此冒沒 誠/非人道 而如有用餘人蔘小許 可以/惠及耶 第玆仰叩 不覺愧汗而已/ 日前池字韻和呈 一笑可呵 留病可/卽進 不備上
卽 弟 丙朝 拜啓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