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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려(旌閭)에 담긴 이야기를 되살린 고문서 ― 「강릉김씨효행록」에서 읽는 삼세사효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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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려(旌閭)에 담긴 이야기를 되살린 고문서 ― 「강릉김씨효행록」에서 읽는 삼세사효의 기억
율곡국학진흥원 이종록
1. 길가에 세워져 있던 정려각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율곡로 2692, 입암동 한편에는 3대에 걸쳐 배출된 네 명의 효자를 기리는 작은 정려각이 서 있다. 그 안에는 김담(金譚, 1522~1605)과 두 아들 김경황(金景滉, 1549~1623)·김경시(金景時), 손자 김한(金垾, 1578~1663)의 이름을 각각 새긴 네 개의 비석이 나란히 놓여 있다. 이른바 강릉김씨의 ‘삼세사효지려(三世四孝之閭)’이다.
삼세사효지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www.aks.ac.kr/index.do]
정려는 충신·효자·열녀 등 뛰어난 행실을 국가가 포상하는 정표(旌表) 제도의 하나이다. 대상자가 살던 집이나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그 행적을 널리 드러냈으며, 세월이 지나 정문과 현판이 낡으면 이를 보호하기 위해 별도의 각을 짓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보는 정려각은 이처럼 정려를 보존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경우가 많다.[1]이수진, 「조선후기 旌閭 관련 고문서와 제도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학위논문, 2023. 그러나 지금 이 정려각 앞에 선 사람은 네 사람의 이름 외에는 많은 것을 알기 어렵다. 이들은 어떤 효행을 실천하여 국가의 포상 대상이 되었을까. 서로 다른 세대의 네 사람은 언제부터 ‘삼세사효’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였을까. 현존하는 정려각만으로는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어렵다. 유적은 네 사람의 이름을 지키고는 있지만, 그 이름에 얽힌 이야기를 모두 들려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침묵을 깨우는 자료가 문중에 전해 온 한 장의 고문서, 「김효자행록(金孝子行錄)」이다. 저자와 현전본의 필사 시기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이 문서는 김담의 행적에서 시작해 두 아들과 손자의 효행을 차례로 기록한다. 김한의 기사 끝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다. “세상에서는 이를 ‘한 집안의 네 효자’라고 일컬었다.(世稱一家四孝云爾)” 행록 뒤에는 1681년 송시열이 지은 「서강릉김씨사효자행록후(書江陵金氏四孝子行錄後)」가 발문으로 붙어 있다. 이 문서는 정려각에 남은 네 이름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한 집안의 효 전통으로 묶였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의 열쇠인 셈이다.
김효자행록(金孝子行錄) B017_01_A00277_001
2. 효자를 알아본 명주군왕
「김효자행록」은 김담의 가계를 강릉김씨의 시조인 명주군왕 김주원(金周元)까지 거슬러 올라가 기록한다. 여기서 김주원과 효의 관계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일화가 『명원세기(溟源世紀)』에 전한다. 신라 혜공왕(惠恭王, 758~780) 때 성각(聖覺)이라는 사람이 병든 어머니를 위해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드렸다. 김주원은 김경신과 함께 이 효행을 조정에 알렸고, 혜공왕은 성각에게 곡식 300석을 내려 포상하였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성각할고(聖覺割股)」에는 성각의 효행과 국왕의 포상만 기록되어 있지만, 『명원세기』에는 그 효행을 알아보고 세상에 드러낸 김주원의 역할까지 남아 있다. 동아시아의 효의 서사를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인물은 순(舜)임금이다. 『중용』에서 공자는 순을 대효(大孝)라 칭송하며, 그의 덕은 성인에 이르렀고 지위는 천자에 이르렀다고 하였다.[2]『중용』, “子曰, 舜其大孝也與. 德爲聖人, 尊爲天子.” 순의 이야기는 그가 효를 실천한 데서 끝나지 않는다. 요임금이 뒤를 이어 나라를 다스릴 사람을 찾자 신하들은 순이 완악한 아버지와 사나운 계모, 교만한 아우를 효로 화합시켰다[克諧以孝]며 그를 천거하였다. 요임금은 두 딸을 순의 아내로 삼게 하고 정사를 맡겨 가정과 조정에서 그의 능력과 덕을 시험한 뒤 천하를 맡겼다. 이처럼 효의 서사는 효를 행하는 데서 시작하지만, 그 효를 알아보고 공적인 가치로 드러내는 데서 완성된다. 20세기 초 문중 자료인 『명원세기』의 저자 김봉기(金鳳起)가 김주원을 ‘효자를 알아본 사람’으로 서술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비록 신라의 왕위 계승에서 밀려났지만, 명주 지역의 군왕이 될 만한 인물과 덕을 알아보는 감식안을 지녔음을 보여주는 서사적 장치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명주군왕의 후손인 강릉김씨가 조선시대 강릉을 대표하는 효자 가문으로 부각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명원세기』의 기록은 ‘효’가 개인의 선행을 넘어 가문의 뿌리와 정체성을 설명하는 언어로 자리 잡아 갔음을 짐작하게 한다.
명원세기(溟源世紀) B010_01_B01050_001
3. 김담, 출세보다 봉양을 택하다
「김효자행록」의 중심 인물인 김담은 1522년에 태어나 1605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효자행록」과 윤봉조가 지은 묘표 「김효자묘표(金孝子墓表)」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 문장에 능했고 과거에도 뜻을 둘 만한 재능을 지녔다. 그러나 벼슬길에 나아가면 귀하게 되는 대신 수명을 해칠 수 있다는 말을 듣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내가 죽으면 누가 내 부모를 봉양하겠는가.[我死孰能養吾親]” 그리고 마침내 과거보러 가는 일을 그만두고 봉양에 뜻을 두었다. 김담은 출세보다 부모 봉양을 택하였다. 부모가 병들자 대변을 맛보아 병세를 살폈고, 부모상을 당해서는 죽을 먹으며 묘소 곁에서 삼년상을 치렀다. 그의 효성에 하늘과 사물이 감응한 것인지, 제사 때 신위 앞에 올린 술이 저절로 마르고 묘소에 세울 석물을 마련하려 하자 단단한 바위가 먹줄을 친 자리를 따라 갈라졌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김담의 지극한 효성이 불러온 감응으로 이해하였다. 강릉부사 양사언은 김담의 효행을 알아보고 조정에 천거하였다. 그가 남긴 「별김효자담오절(別金孝子譚五絶)」은 김담의 효성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仁君倘問金生孝 어진 임금께서 김생의 효성을 물으신다면, 只在杯乾石裂時 술잔이 마르고 돌이 갈라진 그때에 있었다 하리라.[3]양사언, 『蓬萊詩集』, 「別金孝子譚五絶」, “一嶺遠浮晹谷海, 五雲深鎖鳳凰池, 仁君倘問金生孝, 只在杯乾石裂時. 【金祭考, 盃酒自乾, 及葬作碣, 須石自裂, 人以爲誠孝所感也.】 二載粟紅珍富縣, 三年保合大和民, 飛蝗不入橫溪嶺, 天意先知惠孝人. 滫脆君羹終不遺, 忍敎慈母獨無將, 丘民供奉多餘裕, 太守聞來莫敢嘗. 連村比屋回回首, 石表紅旌處處看, 誰將六行昭來許, 課斯人亦改觀. 桃花源裏見朱陳, 君予鄕中講五倫, 笑殺六年東閣守, 時來空薦一忠臣.”
양사언은 1571년 강릉부사로 부임하여 1576년에 체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의 제목에서 김담과의 ‘작별’을 내세우고, 작품 안에서 스스로를 ‘육 년 동안 동각을 지킨 수령[六年東閣守]’이라고 표현한 점을 고려하면, 이 시는 양사언이 강릉을 떠나던 1576년 무렵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ttps://kyudb.snu.ac.kr/book/view.do?book_cd=GK01832_00]
양사언의 시는 김담 한 사람의 효행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는 강릉의 마을마다 석표와 붉은 정려가 보인다고 노래하고, 자신은 육 년 동안 수령으로 있으면서 떠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한 사람을 천거한다며 스스로를 낮춘다.
連村比屋回回首 마을마다 집집마다 거듭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石表紅旌處處看 돌 표석과 붉은 정려가 곳곳에서 보이네.
양사언의 이 시는 효행을 실천한 사람뿐 아니라, 그것을 발견하여 조정에 알리는 사람의 역할까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명주군왕 김주원이 성각의 효행을 발견했듯이, 양사언은 강릉에서 김담을 발견해 내었다.
4. 사세삼효의 서사
김담의 효행은 1617년에 간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제7권의 「김담상분」에 수록되었다. “김담은 강릉부 사람이다. 어버이를 모셔 그 뜻을 어기지 않았고, 어버이가 병들자 대변을 맛보았다.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죽만 먹으며 시묘하였다. 금상 때 정문을 내렸다.” 김담의 두 아들 김경황과 김경시도 같은 책 제6권의 「이자효우(二子孝友)」에 이름을 올렸다. 두 형제는 쉰 살 무렵 잇달아 부모상을 당하자 여막에서 삼년상을 치렀다. 한 번도 집에 돌아가지 않았고 상복과 띠를 벗지 않았으며, 아침저녁으로 묘소에 가서 곡하였다. 눈비에도 이를 멈추지 않고 죽을 먹으며 상을 마쳤다고 한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ttps://kyudb.snu.ac.kr/book/view.do?book_cd=GK01832_00]
「김효자행록」은 김담의 행적이 『삼강행실』 제7권에, 김경황·김경시의 행적이 제6권에 실려 있다고 정확히 기록한다. 따라서 현전 행록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기록을 확인하면서 김담 일가의 효행을 다시 정리한 문서라고 할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에 따르면,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편찬을 담당한 찬집청은 1612년 5월부터 1616년 5월까지 활동하였다. 이 무렵 김담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김담의 삼년상을 치른 김경황·김경시 형제의 효행도 국가에 알려져 편찬 사업에 반영될 수 있었다. 그러나 책에는 아직 세 번째 세대인 김한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김한은 1578년에 태어나 1663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 김경황은 1623년까지 생존하였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찬집이 끝난 1616년에는 김한의 효행이 아직 완결될 수 없었다. 「김효자행록」에 따르면 김한은 아버지의 숨이 끊어지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흘려 넣어 소생시켰다. 어머니가 위독할 때에는 대변을 맛보아 병세를 살폈으며,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는 묘소 곁에서 살면서 제사 음식을 몸소 마련하였다. 이후 김한 역시 관직을 받고 정려되었다. 김한이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실리지 않은 것은 단순한 누락 때문이 아니다. 국가의 책이 완성될 당시 그의 효행은 아직 역사적 사건으로 완결되지 않았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당시까지 완결된 김담과 두 아들의 효행을 기록하였고, 문중의 「김효자행록」은 국가의 책이 담지 못한 다음 세대의 시간을 이어 적었다. 「김효자행록」은 김한의 이야기를 마친 뒤 네 사람을 ‘한 집안의 네 효자’로 묶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서 서로 떨어져 있던 개인의 효행이 「김효자행록」 안에서 비로소 세대를 잇는 가문의 전통으로 완성된 것이다.
5. 행록 뒤에 붙은 송시열의 발문
네 효자의 행적이 하나의 행록으로 정리된 뒤, 송시열은 1681년에 발문을 지었다. 그는 강릉김씨에서 세 세대 사이에 네 효자가 나온 까닭을 물었다. 첫째, 같은 기운과 성품이 서로 전해졌기 때문인가. 둘째, 가문의 교육이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인가. 셋째, 사임당과 율곡의 집안을 가까이에서 보고 감화받았기 때문인가.
윤봉조 찬 김담 묘표 B017_01_A00280_001
송시열의 글은 효자행록의 본문이 아니라, 그 기록을 읽고 의미를 부여한 발문이다. 행록이 네 사람의 행적을 하나로 묶었다면, 송시열은 그 효행을 가문의 교육과 강릉의 풍속으로 확대하였다. 그는 강릉의 풍속에 “집집마다 봉해 줄 만한 아름다움이 있다[比屋可封之懿]”고 칭찬하고, 그 가운데 강릉김씨가 차지하는 몫이 크다고 평가하였다. 옛 원씨 가문이 네 세대에 걸쳐 다섯 명의 삼공을 배출한 ‘사세오공(四世五公)’의 영예조차 강릉김씨 네 효자의 귀함에는 견줄 수 없다고 극찬하였다. 국가의 제도적 공인은 정려와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통해 이루어졌다. 송시열의 발문은 이미 형성된 사효자의 기억에 학문적·도덕적 권위를 더하고, 김담 일가를 강릉의 효 문화를 대표하는 가문으로 해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기억은 후대에도 이어졌다. 『여지도서(輿地圖書)』는 김담의 효행과 양사언의 시를 수록하고, 김경황·김경시·김한이 모두 효행과 우애로 정포되었다는 사실을 전한다. 윤봉조의 「김효자묘표」는 김담의 가계와 효행, 양사언의 천거,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수록과 삼세사효의 정려를 종합하여 후대에 전하였다. 김담의 효행은 강릉 지역과 후손들의 기억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재생산되었다. 영조대 문신이자 오죽헌주인후승 가운데 한 사람인 권계학은 김담의 후손에게 글을 지어 주면서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술잔을 마르게 한 효의 법도를 생각하여 실추시키지 말라.[杯乾孝則思無墜]’ [4]權啓學, 『竹巖漫錄』 地, 「代辛友康彦挽魯澗金僉知【益圭】」. 김담의 ‘술잔이 마른 효성’은 더 이상 한 개인의 기이한 효행담에 머물지 않았다. 후손을 권면하고 가문의 전통을 설명하며, 강릉의 효 문화를 상징하는 언어로 거듭 사용되었다.
6. 한 장의 고문서가 정려의 시간을 되살리다
세 세대 네 효자를 배출했다는 사실 자체가 전국적으로 유일한 것은 아니다. ‘몇 세 몇 효’라는 이름의 정려는 강릉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전한다. 삼세사효정려각의 진정한 가치는 숫자의 희귀성보다, 동일한 인물들에 관한 기억이 국가 편찬서와 문중 고문서, 시와 발문, 읍지와 묘표, 현존 유적에 여러 겹으로 남아 있다는 데 있다. 정려각만 보아서는 네 사람이 왜 한곳에 모였는지 알기 어렵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만 읽어서는 김한을 포함한 ‘삼세사효’의 완성 과정을 알 수 없다. 송시열의 발문만 따로 읽어서는 그 글이 어떠한 행록을 대상으로 쓰였는지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다. 현존 유적과 「김효자행록」, 국가 편찬서와 문집, 읍지와 묘표를 함께 읽을 때 비로소 네 비석 뒤에 숨은 시간이 드러난다. 이 가운데 「김효자행록」은 서로 떨어진 자료들을 이어주는 중심에 있다. 이 문서가 전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김한의 구체적인 효행과 정려, 네 사람을 ‘일가사효’로 묶은 가문의 기억, 송시열이 발문을 짓게 된 배경을 온전히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정려각은 네 효자의 이름을 지켰고, 한 장의 고문서는 그 이름들이 맺고 있는 관계와 시간을 되살렸다. 지금도 강원 지역의 문중과 오래된 집에는 정려와 비석, 묘소와 재실의 내력을 밝혀 줄 행록, 기문, 족보, 편지 등의 자료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료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고 제대로 정리되지 않는다면, 그 자료와 연결된 유적 역시 이름만 남긴 채 침묵하게 된다. 국학자료를 세상에 소개하려면 먼저 자료를 조사하고 수집하여 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개인과 문중이 보관해 온 자료를 전문기관에 기탁하여 안전하게 보존하고, 디지털 아카이브를 통해 공개함으로써 현존 유적과 연결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서로 다른 장소에 흩어져 있던 자료들이 만날 때, 무심히 지나치던 정려와 비석도 비로소 지역의 역사를 들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정려각은 네 효자의 이름을 지켜내었고, 「김효자행록」은 그 이름 뒤에 놓인 관계와 역사를 되살려냈다. 강원의 국학자료를 발굴하고 아카이브로 이어가는 일은 외로이 남은 유적에 감추어진 역사적 맥락을 다시 밝혀내는 일이다.
관련주석
  • 1↑ 이수진, 「조선후기 旌閭 관련 고문서와 제도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학위논문, 2023.
  • 2↑ 『중용』, “子曰, 舜其大孝也與. 德爲聖人, 尊爲天子.”
  • 3↑ 양사언, 『蓬萊詩集』, 「別金孝子譚五絶」, “一嶺遠浮晹谷海, 五雲深鎖鳳凰池, 仁君倘問金生孝, 只在杯乾石裂時. 【金祭考, 盃酒自乾, 及葬作碣, 須石自裂, 人以爲誠孝所感也.】 二載粟紅珍富縣, 三年保合大和民, 飛蝗不入橫溪嶺, 天意先知惠孝人. 滫脆君羹終不遺, 忍敎慈母獨無將, 丘民供奉多餘裕, 太守聞來莫敢嘗. 連村比屋回回首, 石表紅旌處處看, 誰將六行昭來許, 課斯人亦改觀. 桃花源裏見朱陳, 君予鄕中講五倫, 笑殺六年東閣守, 時來空薦一忠臣.”
  • 4↑ 權啓學, 『竹巖漫錄』 地, 「代辛友康彦挽魯澗金僉知【益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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