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마당

  •  옛 문서 이야기
    •  사람 이야기
    •  땅 이야기
    •  별별 이야기
  •  소장자 이야기
  •  이달의 자료
홈 > 이야기 마당

과거(科擧) 시험 응시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 식년(式年) 진사시에 합격한 86세의 조석삼(曹錫三) 시권

조회수 : 30회
김철운(율곡국학진흥원)
“인생은 시험(試驗)의 연속인가?” 우리는 ‘시험’이란 굴레를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갈 수가 없을까! 물론 그랬으면 좋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이 우리네 인생살이가 아닐까! 끊임없이 남으로부터 평가를 받아야 하거나 자신을 남에게 증명해야 하는 시험을 몸소 이겨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존재 이유가 아닐까!
우리는 일평생 다양한 시험들과 마주하면서 살아간다. 그중에서도 특히 초등학교에서부터 중등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학생들 간의 치열한 경쟁 구도 속에서 펼쳐지는 학교 시험, 사회 초년생으로서 본격적인 사회생활에 두 발을 내딛기 직전에 부딪히는 입사시험, 사회생활 중에 남들보다 더 나은 삶의 성공을 쟁취하기 위한 시점에서 마주치는 직장 내의 승급시험 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이 외에도 사람들은 각자의 상황에 따라서 일평생 많은 시험을 치르면서 살아가고 있다. 결과적으로 현재 우리는 그렇게 많은 시험을 이겨내면서 성장해 나가는 동시에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서 사회적 성공이라는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고 있다.
그럼 과연 과거(科擧) 시험에 인생 전체를 걸었던 조선 사회의 선비들은 어떠했을까? 주지하다시피 오늘날의 고시(考試) 시험보다도 아주 높은 경쟁률과 시험의 최고 난이도를 자랑했던 조선 사회에서의 과거 시험 합격은 개인의 사회적 성공과 명예는 말할 것도 없고 가문과 지역의 영광을 드높이는 아주 영예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과거 시험을 벗어난 자신들만의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오직 꿈에서나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과거 합격은 그 당시의 사회 분위기상 장시간의 시험 준비로 인한 그 자신들의 고통스러운 삶의 여정을 단숨에 일소해 버리는 만병통치약(萬病通治藥)과도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대부분 자신의 성공과 가문의 영광을 위해 사서오경(四書五經), 당·송(唐宋)의 시문(詩文), 역사서 등에 대한 암송 및 방대한 분량의 문자학(시(詩) · 부(賦) 등의 운문(韻文)과 표(表) · 전(箋) 등의 사륙문(四六文, 사륙변려문)에 대한 이해를 위해 평생을 오직 과거 공부에만 매진하였다.
조선 사회의 과거 시험 응시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였다. 물론 사람들이 처한 환경에 따라서 조금의 차이를 보였겠지만, 주어진 여건이 허락하는 한 나이와 무관하게 합격할 때까지 과거 시험에 응시한 선비들이 아주 많았다. 현재 알려진 바에 의하면, 조선 시대 과거 합격자 중에서 사마시와 문과의 최고령자는 90세에 1861년(철종 12) 식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에 정시(庭試) 병과(丙科)에 합격한 김재봉(金在琫, 1972〜?)이며, 또한 90세에 1888년(고종 25) 기로응제시(耆老應製試, 노인을 우대하여 실시한 특별 과거)에서 탐화(探花)로 합격한 박화규(朴和圭, 1799〜?)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보더라도 참으로 경탄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강릉 서지골에 소재한 ‘창녕조씨 명숙공종가’에서 율곡국학진흥원에 기탁한 자료 중에는 강릉 출신으로 김재봉이나 박화규보다 4살이 적지만 86세의 나이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인물의 시권(試券)이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창녕조씨를 본관으로 하는 조석삼(曹錫三, 初名 錫上, 1813〜1896)이다. 그의 과거 시험 응시 당시 나이는 그가 작성하여 제출했던 시권(試券)의 봉미(封彌, 과거 시험을 볼 때 답안지 오른쪽 끝에 본인의 신분, 성명, 나이 본관, 거주지와 사조(四祖, 부·조·증조·외조)의 관함 · 성명 등을 써서 봉하여 붙이는 일)에 잘 기록되어 있다.
진사지 초시 시권 : 유학 조석삼 나이 85세, 본관 창녕, 거주지 강릉(幼學曹錫三年八十五本昌寧居江陵) 진사시 복시 시권 : 유학 조석삼 나이 86세, 본관 창녕, 거주지 강릉(幼學曹錫三年八十六本昌寧居江陵)
조석삼은 85세 되던 1887년(고종 24)에 치러진 진사시(進士試) 초시(初試)에서 ‘위로 원하는 것은 자손의 창성이요 아래로 원하는 것은 농사의 풍년과 백성들의 불어남이다.[願乎上者, 子孫昌盛, 願乎下者, 歲熟民滋.]”를 지어서 차하(次下)의 성적을 받았다. 그리고 86세 되던 1888년(고종 25) 2월 19일 제2소(第二所)인 성균관에서 치러진 식년(式年) 진사시(進士試) 복시(覆試)에서 ‘바야흐로 봄빛이 화창한 시절[方春和時]’을 지어서 차상(次上)의 성적을 받고 ‘진사 2등 제4인으로 합격하였다.’[進士二等第四人入格].
이제 여기서 한가지 명확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데, 이는 과거 응시 당시 조석삼의 나이에 대한 것이다. 즉, 『숭정기원후오무자식년사마방목(崇禎紀元後五戊子式年司馬榜目)』에는 그의 출생 연도가 갑자년(甲子年)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에서는 이 갑자년을 1864년(고종 1)으로, 합격 나이를 25세로 기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조석삼이 작성한 시권 봉미의 ‘86세’는 잘못된 표기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이는 그의 아버지 조환진(曹桓鎭)이 관에서 발급받은 준호구(準戶口)를 통해서 분명히 확인된다. 즉, 〈1825년 강릉대도호부 준호구〉에 기록된 ‘아들 석성, 나이 계유년(1813) 13세.[子錫上年癸酉十三.]’, 〈1828년 강릉대도호부 준호구〉에 기록된 ‘아들 석상 석삼으로 개명, 나이 16세 계유년(1813).[子錫上改錫三年十六癸酉.]’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사마방목의 내용은 기록자의 오류로 보이기에 시권과 준호구에 근거하여 반드시 ‘생년(生年) 계유(癸酉) 1813년(순조 13), 합격 연령 86세’로 반드시 정정되어야 할 것이다.
아무튼 그 이후에 조석삼은 대과(大科)에 도전하지 않았다. 이는 아마도 한편으로 그의 나이에 따른 건강 문제도 있었을 것이고, 또 한편으로 진사가 그의 최종 목표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과거 합격 이후에 관직에 오르지 않은 유학(幼學) 신분에서 진사시에 합격한 진사(進士) 신분으로의 상승을 끝으로 자신이 평생 목표로 삼았던 과거 공부의 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럼 조석삼은 진사시 합격 이후에 조정으로부터 어떠한 대우를 받았는가? 이는 그 당시 조정에서 그와 그의 선조들에게 내린 고신(告身, 조선 시대에 관원에게 품계와 관직을 수여할 때 발급하던 임명장)과 관에서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일종의 호적등본) 등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첫째, 조석삼에 대한 조정의 관직 임명이다. 즉, 비록 그의 관직이 수직(壽職)으로 임명된 명예직이기는 하지만 그는 정3품(正三品) 당상관을 시작으로 하여 종2품(從二品)에까지 올랐다. 예컨대, 86세 때인 1888년 3월에 정3품 당상관인 통정대부 돈녕부 도정(通政大夫 敦寧府 都正), 같은 해 4월에 정3품 당상관이자 종4품인 절충장군(折衝將軍) 행(行)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 같은 해 4월에 종2품인 가선대부(嘉善大夫), 93세 때인 1894년 2월에 종2품이자 종4품인 가의대부(嘉義大夫) 행(行) 용양위 호군(龍驤衛護軍), 같은 해 2월에 가의대부(嘉義大夫) 임명 등이 그것이다.
둘째, 조석삼의 부인 및 선대에 대한 추증(追贈)이다. 즉, 그가 진사시 합격으로 높은 관직에 오르면서 그 공덕이 선대에 미쳤다는 이유에서였다. 예컨대, 1888년 3월에 돌아가신 부인 김씨(金氏)의 정3품 숙부인(淑夫人), 1890년 10월에 돌아가신 어머니 김씨의 종2품 정부인(貞夫人), 1890년 10월에 돌아가신 할머니 김씨의 숙부인, 1890년 10월에 돌아가신 증조 할머니 윤씨의 숙인, 1890년 10월에 돌아가신 증조 할머니 최씨의 정3품 당하(堂下) 숙인(淑人) 추증 등이 그것이다.
또한 1890년 10월에 돌아가신 아버지 조환진(曺桓振)의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 겸(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1890년 10월 돌아가신 할아버지 조윤목(曺允睦)의 정3품 당상관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겸(兼) 경연 참찬관(經筵 參贊官), 1890년 10월 돌아가신 증조할아버지 조명숙(曺命肅)의 정3품 당하관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司僕寺) 정(正) 추증 등이 그것이다.
셋째, 조석삼의 준호구(準戶口) 내의 관직 변화이다. 이 준호구는 그가 자신의 호(戶, 집)의 상황을 적어서 관에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를 확인한 다음 관인(官印)과 주협개자인(周挾改字印 : 지운 것[周], 끼워 쓴 것[挾], 고친 것[改]이 총 몇 글자인지를 적어 넣은 것)을 찍어 호주에서 돌려준 것이다. 현재 그의 준호구가 여러 장 남아 있는데 진사시 합격 이후인 89세(1891년 신묘년 1월)와 93세(1894년 갑오년 1월)에 강릉도호부(江陵都護府)에서 발급된 준호구에는 앞서 언급한 그와 그 선조들의 최종 품계가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결국 조석삼의 많은 나이로 볼 때 그는 아마도 강릉에서 한양까지의 여정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고, 또한 그 여정의 후유증으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도 없었을 것이며, 나아가 시험 기간에 발생했을지도 모르는 여러 가지 돌발 변수로 인하여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당당히 진사시에 합격하여 그 자신은 물론 가문과 후손의 영예를 위한 소원을 이룰 수가 있었다.
나아가 조석삼은 학자로서의 공인된 지위와 명예도 함께 얻은 동시에 선비로서의 위신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며, 그 지역에서의 입지도 그 이전에 비해 더욱 탄탄해졌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지금이라도 반드시 과거 시험 응시에서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다는 점을 몸소 실천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야 한다. 이러한 그의 나이를 잊은 도전에 무한한 경의를 표한다.
이전 평산신씨 문희공파 종중(신현만 회장)
다음 다음 항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