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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물의 효행(孝行)을 세상에 널리 알리다 : 강릉 유생들의 김동수(金東秀) 정려(旌閭) 포상 요청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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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운(율곡국학진흥원)
최근 언론에서 자주 보도되다시피 부모와 자식 간의 다양한 갈등 양상, 대립과 반목, 법적 분쟁 등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는 현 상황에서 ‘효’는 마치 박제화된 화석이 되어 가듯이 그 생명력을 거의 상실했다고 봐도 될까? 그렇다면 과연 전통사회의 “효는 백행(百行)의 대본(大本)”이라는 말은 실로 그 유효기간이 끝난 걸까? 구체적으로 말해, ‘효’는 “부모를 봉양하고 마음 편히 모시는 일”, ‘효행(孝行)’은 “부모를 효성으로 잘 섬기는 행실”이라는 사전적 정의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될까? 한편으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여전히 존재하는 한 그 ‘효’의 본질적 의미와 가치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현재 ‘효행’을 위한 기본 출발은 무엇이어야 할까? 아무래도 이는 ‘자식의 부모에 대한 순종적 삶의 지향’이 아니라 ‘공감 능력에 바탕을 둔 서로의 삶에 대한 이해와 존중의 지향’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한 생각이 불현듯 일어나는 중에 여러 고문서를 뒤적이다가 강릉부(江陵府)의 많은 유생(儒生)이 연명(聯名)으로 한 인물의 ‘효행’을 칭송하고, 이에 대해 조정에 정려(旌閭) 포상(褒賞)을 요청하는 내용의 문서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인물은 다름 아닌 대대로 효자 가문으로 널리 알려진 ‘강릉김씨 노가니[魯澗] 김진사 댁’의 김동수(金東秀, 1788〜1820)이다. 현재 이 가문이 소장한 그의 정려 포상 요청 문서는 상서(上書) 3점, 상언(上言) 4점, 소록(小錄) 2점 등 총 9점이다. 여기서 관청의 공식적인 처분 문서는 상서 3점이고, 나머지는 초본(사본) 및 요약본들이다.
1842년 이낙형 등 상서
1843년 심학서 등 상서
그러한 문서들에 의하면 강릉을 비롯한 양양의 많은 유생이 조정에 김동수의 효행에 대한 정려 포상을 요청한 기간은 아주 길었는데, 즉 이는 1842년을 시작으로 하여 1859년까지 총 17년간 지속되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1842년(헌종 8) 5월 강릉부 유생(儒生) 이낙영(李洛榮)·심봉서(沈鳳書)·권우(權楀) 등 34명이 강릉부사에게 올린 상서, 1843년(헌종 9) 3월 강릉부 유생 심학서(沈鶴書)·이낙영·심봉서 등 34명이 강원도 관찰사에게 올린 상서, 1846년(헌종 12) 2월 강릉부 유생이 헌종에게 올린 상언 사본, 1854년(철종 5) 5월 강릉부 유생 박문형(朴文亨)·심용서(沈龍書)·권우(權楀) 등 40명이 암행어사에게 올린 상서, 1859년(철종 10) 8월에 강릉의 진사 등이 철종에게 올린 상언 사본, 1859년(철종 10) 8월에 강원도 양양(襄陽)의 진사 이계필(李啓泌, 1790∼?) 등이 철종에게 올린 상언 사본 등이다.
1584년 박문형 등 상서(앞)
1854년 박문형 등 상서(뒤)
그 문서들은 하나같이 김동수의 효행에 대한 정려 포상을 요청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한 내용을 계속 반복하고 있는데, 그 전체 내용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의 세 가지 정도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김동수는 3대에 걸쳐 ‘효행’으로 정려를 받고 대대로 효자 집안으로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한 가문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그 대표 인물은 그의 9대조 김담(金譚, 1522~1605), 그의 8대조 김경황(金景滉, 1549∼1623)과 김경시(金景時, ?∼?) 형제, 그의 7대조 김한(金垾, 1578∼1663) 등 4명이다. 이들의 효행은 이 가문이 소장한 〈김담 행록(金譚行錄)〉·〈김효자 행록(金孝子行錄)〉과 강릉 읍지인 《증수 임영지(增修臨瀛誌)》 그리고 조선의 효자·충신·열녀를 수록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등에 잘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담은 자(字)가 담지(譚之), 호가 진재(眞齋)로 강릉김씨 노가니 김진사 댁의 가장 대표적인 효자로서 조정으로부터 정려와 관직을 받고 1759년(영조 35) 강릉 12향현(響賢)으로 강릉향현사(江陵鄕賢祠)에 추향된 인물이다. 그의 효행은 많은 사람들의 감동과 탄복을 끌어내기에 충분하였다. 즉, 평소 아버지의 뜻을 어기지 않고, 아버지가 병들었을 때 변을 맛보고 약을 지었으며,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가 아침저녁으로 올린 술잔은 저절로 말랐다고 한다. 또한 그가 묘역에다 석물(石物)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돌을 쪼개기가 어려워서 그 돌을 잡고 슬프게 울자, 돌이 먹줄을 따라 저절로 갈라졌다고 한다. 나아가 3년 동안 오직 죽만 먹고 시묘살이하였고, 깊은 애통함에 눈에 피눈물이 나서 눈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효행에 대해 강릉부사였던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은 시를 지어 그의 지극한 효성을 기렸다.
김경황과 김경시 형제는 아버지 김담의 효행을 보고 자란 효자들로서 아버지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되자 지극한 효성(孝誠)으로 눈을 보이게 하였다고 한다. 이후 나이 50살에 잇달아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3년 동안 묘막에 살면서 한 번도 집에 돌아가지 않았고, 눈과 비에도 아침저녁으로 울음을 멈추지 않았으며, 오직 죽만 먹으면서 시묘살이하였다고 한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 김담의 김당상분
동둑신속삼강행실도 : 김경환 김경시의 이자효우
김한도 그러한 효행의 가풍을 이어받은 효자로서 아버지 김경황이 위독할 때 단지수혈(斷指輸血)의 효행, 즉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먹여 병을 낫게 하였고, 어머니가 위독 하자 변을 맛보면서 지극히 간호했으며,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죽만 먹으면서 3년 동안 시묘살이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효행의 결과로 위 네 사람은 ‘삼세사효(三世四孝)’의 가문으로 사람들의 칭송을 자아냈고, 강릉을 넘어 조선 전역에 그 명성을 널리 알렸다.
김정희의 삼세사호지려
둘째, 김동수는 그러한 효자들을 배출한 가문의 가풍을 이어받은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지극한 효성과 뛰어난 행실을 보였기 때문에 조정으로부터 정려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의 효행은 그의 선조들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즉, 그는 어머니 남양홍씨(南陽洪氏)의 병환에 여러 달 동안 약 시중을 들었고, 어머니가 위독하자 밤낮으로 자신이 대신하기를 빌면서 간호하였으며, 임종 직전에 ‘단지수혈의 효행’으로 어머니의 생명을 이어갔다고 한다. 또 어머니의 장례 후에는 아침저녁으로 묘소에서 곡하였으며, 묘소 앞에서 제수(祭需)를 올리는 것을 한결같이 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김동수가 그의 7대조인 김한과 마찬가지로 단지수혈(斷指輸血)의 효행을 했다는 것인데, 이는 전통사회에서 효자의 전형적인 행위로 효행의 극진함이 강조될 때 자주 등장하는 내용이다. 물론 오늘날 누구나 이러한 행위 자체가 병의 치료와는 전혀 관련 없음을 잘 알고 있지만, 이는 자식의 부모에 대한 효행이 그만큼 크고도 높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 때문에 강릉의 유생들은 그의 선조들처럼 그가 정려 포상의 대상으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보고, 계속해서 조정에 그의 효행에 대한 정려 포상을 요청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김동수가 효행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정려를 받지 못한다면 이는 성대한 세상의 흠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품행과 도의를 정려하고 포상하는 것이 조정의 훌륭한 법이며, 숨어있는 은인(隱人)을 드러내어 알리는 것이 사림의 공의(公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물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왜 많은 유생이 연명으로 오랜 기간 김동수의 효행에 대한 정려 포상을 요청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문서의 내용만으로는 정확히 판단할 수 없지만, 추측컨대 유생들의 주장 이면에는 앞서 말한 김동수의 선대(先代)가 쌓은 ‘삼세사효’의 전통을 그에 대한 정려 포상을 통해서 지속시켜야 한다는 점과 그가 33살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았나 한다.
또 하나는 왜 강릉부사와 강원 관찰사 그리고 암행어사 등은 공통적으로 강릉 유생들이 올린 상서(上書)에 대해 기다리라는 처분만을 내리고, 그 어떠한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그 처분의 내용은 대체로 강릉부사의 ‘흠양하고 공경함을 알 수 없으니 마땅히 사실을 기록하여 감영에 보고하겠다는 처분’(1842년 상서)과 강원도 관찰사의 ‘국왕에게 아뢰는 것’은 것은 체모(體貌)가 중대하니 물러나서 공의(公議)를 기다리라는 처분’(1843년 상서) 그리고 암행어사의 ‘국왕에게 아뢰는 것을 마땅히 헤아려 처리하겠다고 처분’(1854년 상서) 등이다.
물론 그러한 관청의 처분들은 김동수의 효행에 대한 정려 포상을 더 합리적인 절차에 따라 진행하겠다는 나름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문제의 핵심은 그러한 처분을 내린 이후에 전혀 일의 진척이 없어서 강릉부의 유생들이 계속해서 상서를 올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효행은 그의 선조들에 비추어 볼 때 정려를 받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정려가 계속해서 지연된 이유는 무엇일까? 추측컨대, 이는 한편으로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정치적 혼란과 외척 세력의 권력 다툼이 만연했던 세도정치기(世道政治期)라는 것, 또 한편으로 김동수의 가문에서 김담과 김경황·김경시 형제 등이 정려를 받았다는 것 등과 맞물려 있지 않았나 한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예상일 뿐이다.
이렇듯이 강릉부 유생들이 진행한 김동수의 효행에 대한 정려 포상의 요청은 1859년으로 막을 내렸는데, 현재 남아 있는 그 요청 문서들은 한 인물의 효행이 그 지역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고, 지역 전체가 한 인물의 정려를 받아내기 위해 어떠한 공론 절차와 합의 과정을 거쳤으며, 나아가 어떠한 방식으로 공동체 의식을 형성해 나갔는가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잘 들려주고 있다.
1846년 강릉부 유생 상언
1859년 양양진사 이계필 상언
결국 비록 조선 사회에서 많은 지역에 대한 정려 포상이 국가적으로 미풍양속의 장려라는 명목 아래 통치 기반 조성에 그 목적을 두고 있기는 하였지만, 지역적으로 단순히 한 개인의 포상을 넘어서 가문과 지역 전체의 공동체 자부심을 드높이는 아주 영예(榮譽)로운 일이었다. 이 때문에 김동수에 대한 장려 포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그 당시 조정에 대한 강릉부 유생들의 깊은 허탈감과 강한 실망감을 불러오기에 충분했음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따라서 강릉부 유생들이 17년이란 기간 동안 그에 대한 정려 포상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그가 정려를 받지 못한 것은 지금도 여전히 많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참고문헌〗
《東國新續三綱行實圖》 〈孝子圖〉, 권6 〈二子孝友〉, 권7 〈金譚嘗糞〉.
《중수임영지(重修臨瀛誌)》, 정항교 번역, 임호민 역주, 강릉 문화원, 2021.
《강릉김씨 노가니 김진사댁》, 노인환 저, 율곡연구원, 2024.
한국학아카이브, yulgo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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