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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을 배반한 노비[叛奴]에 대한 처분을 묻다 –강릉 청풍당 건립자 권계학의 수신 간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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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운(율곡국학진흥원)
‘반노叛奴’, 즉 ‘주인을 배반한 노비’는 어떤 부류일까? 노비의 삶이 어떠했길래 그들은 ‘반노’의 길로 나갔을까? ‘반노’로서의 삶은 그 이전의 삶과 무엇이 달랐을까? ‘반노’의 소송은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그 판결은 대체로 어떻게 결정되었을까? 결국 판결로 자신의 권리를 되찾은 본 주인[本主]은 ‘반노’를 되돌려받았을까? 이러한 물음 속에서 먼저 드는 생각은 ‘반노’마다 ‘반노’가 된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철저한 노비의 세습제 국가였던 조선에서 면천免賤되어 양민이 되지 않는 한 노비의 신분을 벗어나지 못한 ‘반노’로서의 삶은 그 이전의 삶처럼 그리 녹록지 않았을 거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먼저 한가지 고려되어야 할 점은 비록 노비 중 일부가 자신의 재산을 소유하고 거주 이동의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주인의 재산으로 간주 되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반드시 본 주인의 명령을 따라야 했으며, 때에 따라서는 가혹한 대우를 받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그들 중에 일부는 그러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멀리 도망가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숨기면서 살아가기도 하였고, 노비의 신분을 유지한 채 투탁(投托), 즉 국가기관이나 세력이 있는 사람에게 의탁해 살아가기도 하였다.
율곡국학진흥원에는 강릉의 안동권씨 청풍당(淸風堂)의 기탁 자료로 그러한 ‘반노’ 관련 문서가 총 3점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한 집안이 소송한 ‘반노의 투탁’에 대한 사안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것들이 모두 ‘노비추쇄소지’가 아닌 제삼자가 ‘반노’가 투탁한 곳의 수령에게 그 사안에 대한 엄중하고 합당한 판결을 요청하는 내용의 간찰(簡札)이라는 것이다.
1769년 이윤 간찰 Ⓒ 율곡국학진흥원
첫 번째 간찰은 1767년 9월 10일에 당시 예안현감(禮安縣監, 1767년 6월 30일 부임) 이연李沇(1712∼?)이 당시 연원찰방(連原察訪, 1765년 12월 22일∼1767년 12월 19일) 죽암(竹巖) 권계학(權啓學, 1716∼1788) 에게 보낸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연은 먼저 자신이 패잔(敗殘)한 지역을 맡았는데, 흉년을 만나서 백성들에 대한 걱정이 눈에 가득하며, 또한 충청도에 왔다가 권계학이 재임하고 있는 역이 가깝게 있음을 모르고 만나지 못해 아쉽다는 안부 인사를 전한다. 이어서 그는 자신이 권계학에게 간찰을 보낸 목적을 밝힌다. 즉, 이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8대손으로 당시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조은(釣隱) 이세택(李世澤, 1716∼1777) 집안의 ‘반노’에 대한 일을 반드시 올바른 명분과 엄중한 법률에 근거하여 본 주인에게 귀속시키는 판결을 해 달라는 요청이다. 왜냐하면 그 도망간 노비의 내력이 장적(帳籍, 일종의 호구대장)에 명확하게 적혀 있음에도 그가 연원역(連原驛)에 투탁 하였다는 이유에서이다.
1769년 이급 간찰 Ⓒ 율곡국학진흥원
1769년 이급 간찰 Ⓒ 율곡국학진흥원
이급은 먼저 지난 가을 짧은 만남 이후에 어떻게 지냈는지를 묻고, 이어서 앞선 이연이 요청한 것과 동일한 ‘반노’의 사안에 대한 엄정한 판결을 요청한다. 즉, 영천(榮川)에 있는 자신의 족형(族兄) 이세택의 집 노비가 무단히 주인을 배반하고 연원역(連原驛)에 투탁하여 속안(屬案, 노비와 원속(園屬)을 기록한 문서)에 들어갔다는 이유에서이다.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이세택의 소지(所志, 관부에 올리는 소장, 청원서, 진정서 등)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니, 그것을 한번 보면 그 노비가 거짓으로 속이는 것[위모僞冒]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급의 간찰에는 간략하게나마 그 당시의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는데, 즉 그 이전부터 문제로 지적 되어왔던 ‘반노’의 투탁에 대한 폐단이다. 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사천(私賤)의 무리가 조금이라도 가산이 있으면 주인을 배반할 계책을 내어 궁시(宮寺, 내수사內需司, 왕실 재정의 관리를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에 들어간다.”라는 것이다. 이렇듯이 재산이 있는 노비가 내수사와 같은 권력기관에 투탁한 이유가 무엇일까? 간단하게 말해, 이는 아마도 공천(公賤)이 사천(私賤)보다 권세가 컸고, 양민보다 더 우세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내수사는 그러한 ‘반노’의 투탁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였는가? 즉, 실록에 의하면 내수사가 투탁 하러 들어오는 문을 크게 열어놓고서 면밀한 조사는 고사하고 그 이유도 묻지 않고 반노들을 소속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 주인은 감히 고소하지 못하고 꼼짝 못 하고 빼앗기기도 하며, 나아가 내수사에 소속된 반노들이 이후에 본 주인을 능욕·모함할 것에 두려워하였다는 것이다. (󰡔명종실록󰡕 17권, 명종 9년(1554) 8월 24일 임진 2번째 기사)
둘째는 “송사를 다스리는 자가 또한 분명히 조사하지 못하고 대부분 점거하고 아끼는 바람에 그 간계(奸計)를 성취하게 되어 자주 이어져 일어난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폐단은 내수사의 막강한 권한과 직접적 관련이 있었다. 즉, 실록에 의하면 해당 관청은 ‘반노’의 시비(是非)를 분명하게 알고 있음에도 내수사에 죄를 얻게 될까 염려하여 확실히 조사하지 않고 법을 어겨 가면서 그 자취를 덮어주고 감히 적발하지 못하였으며, 지방에서는 별좌(別坐)·서제(書題, 내수사의 관원) 및 하인들이 수령들을 공갈하고 협박하여 감히 손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명종실록󰡕 17권, 명종 9년(1554) 8월 24일 임진 2번째 기사)
한편으로 비록 해당 관청에서 내수사에 들어가 의탁한 반노들을 이미 상세하게 조사하여 본 주인에게 주기로 결단하여 호조(戶曹)에 이첩(移牒)하고, 호조에서는 내수사에 넘겼지만, 내수사에서 전혀 조사하여 보고하지도 않거나 방계(防啓, 남의 의견을 막고 자신의 의견을 임금에게 아뢰는 것)까지 하였다는 것이다.(󰡔숙종실록󰡕 18권, 숙종 13년(1687) 1월 27일 병오 1번째 기사)
이상으로 본다면 내수사가 그러한 투탁에 대한 폐단의 중심에 서 있었고, 이로 인해 그 폐단은 더욱더 가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 사회의 공적 네트워크를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즉, 본 주인은 주인대로 반노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기 어려웠고, 관은 관대로 내수사의 권위에 눌러 미봉만하고 세월만 보내고 있었으며, 조정은 조정대로 폐단의 시정을 위해서 이렇다 할 확실한 대비책을 내놓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명종실록󰡕 9년(1554) 8월 12일 경징 3번째 기사) 결국 이러한 노비 제도는 정조 2년(1778년)에 노비추쇄관 폐지와 정조 9년(1785)에 노비추쇄법 폐지 및 순조 원년(1801년)에 내수사와 각 관방(官房)의 노비원부(奴婢原簿)를 태워버리는 등으로 차츰 사라져 갔다.
이와 같이 이급은 그러한 반노의 투탁에 대한 폐단을 언급하고, 자신의 요청이 한 집안의 사사로운 아부하는 말이 아님을 천명하면서 “공公께서는 조사하여 노비를 내어주고 거짓 기록[위록僞錄]을 혁파하여 후일에 다시 일어나는 단서가 없기를 바랍니다.”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결국 그는 먼 곳에서 우러러 바라는 마음에 부응해 달라고 간곡히 간청하면서 간찰의 끝을 맺는다.
그럼 이연과 이급의 간찰은 그들이 권계학과의 친분(이연은 ‘아우[弟]’로, 이급은 ‘동료 아우[요제僚弟]’ 및 ‘옛날 동료 아우[舊僚弟]’로 자신을 표현함)을 내세워 자신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해 달라는 청탁성 간찰로 치부될 수 있을까? 단적으로 말해, 그것들은 그 내용상 그러한 청탁성 간찰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 보듯이 그들은 단순히 어떠한 근거도 없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그 노비의 내력이 정확히 적혀 있는 ‘장적(帳籍)’ 및 이에 근거한 이세택 집안의 ‘소지’ 등을 증거로 제시하여 그 반노를 본 주인에게 반드시 귀속시켜야 한다는 나름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권계학은 이세택 집안의 ‘반노’ 사안을 어떻게 판결했을까? 아쉽게도 현재로선 그것과 관련된 후속 문서(권계학의 발신 간찰 내지 판결문 등)들이 없으므로 그 결과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여기서 그 당시의 ‘반노’에 대한 사회적 인식, 그러한 투탁에 대한 폐단 등은 차치하더라도 앞서 보듯이 이연과 이급이 간찰에서 제시한 증거들을 고려할 때, 추측컨대 그는 법의 테두리 내에서의 엄정한 판결로 그 ‘반노’를 이세택 집안의 노비로 다시 귀속시키지 않았나 한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성 주장일 뿐이고, 하루빨리 그 판결과 관련된 후속 문서가 나타나기를 기대해 본다.
※ 권계학은 자는 성집(聖集)·성박(聖博), 호는 죽암(竹巖),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안동권씨 추밀공파의 후손으로, 오죽헌 주인 권처균(權處均)의 6세손이다. 1747년(영조 23) 식년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춘추시강원문학(春秋侍講院文學) 등을 역임하였다. 1765년 연원도찰방(連原道察訪)을 끝으로 낙향하여 1774년 오죽헌 옆에 청풍당을 짓고 여생을 보내다 향년 73세로 졸하였다. 《죽암유고竹巖遺稿》는 그의 시문집으로, 총 3책(천, 지, 인) 5권으로 되어 있으며, 2023년에 율곡연구원에서 총 3권으로 번역·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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