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이야기 마당
공동체적 삶의 실현을 위한 모임 : 향약계 --「남이리면 향약계 성첩南二里面鄕約契成帖」-
|
김철운(율곡연구원)
건전하고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힘은 무엇인가? 물론 사람들에 따라서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타인의 주장, 감정, 생각 등에 대하여 자신도 그렇다고 느끼는 공감(共感) 능력에 기반한 공동체적 삶의 실현에 있지 않나 한다. 여기서 공동체가 사전적 정의상 ‘공통의 가치와 정체성을 가지고 특정 사회문화적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이해된다고 한다면 이러한 공동체 안에서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약속한 규범과 전통적인 도덕적 관습을 지켜 나가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건전한 사회질서의 유지 및 건강한 인간관계의 형성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최근에 과거 사람들이 무엇을 통해서 그러한 공동체적 사회를 실현·유지하려고 하였으며, 어떻게 그러한 공동체적 삶을 형성해 나가려 했는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율곡연구원 수장고에서 과거 사람들의 공동체적 삶과 관련된 강릉의 옛 문서들을 찾아보던 중 강릉의 향약계 관련 자료가 눈에 들어왔다.
「남이리면향약계성첩」 Ⓒ 율곡연구원(기탁:강릉김씨 노가니 김진사댁)
이 자료는 2023년에 ‘강릉김씨 노가니 김진사댁’에서 율곡연구원에 기탁(寄託)한 여러 자료 중의 하나로 ‘사회적 교화를 목적으로 조직한 향약계의 규약’을 하나의 첩으로 만든 「남이리면 향약계 성첩(南二里面鄕約契成帖)」이다. 비록 이 성첩이 그 내용이 아주 간략하여 조선시대에 향인들의 삶을 진작시키기 위해 향촌사회에 보급된 향약(鄕約:鄕村規約), 즉 향약의 ‘덕업상권(德業相勸, 좋은 실을 서로 권한다.)’, ‘예속상교(禮俗相交, 예의와 바른 풍속으로 서로 교제한다.)’, ‘과실상규(過失相規, 과실을 서로 경계한다.)’, ‘환난상휼(患難相恤, 어려운 일을 서로 돕는다,)’ 등의 4대 덕목과 이에 대한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실천 조항을 세밀하면서도 명확하게 수록하지는 않고 있지만, 그것은 그러한 향약의 기본 정신에 기반한 도덕 질서의 확립과 미풍양속(美風良俗)의 진작을 위한 규약을 큰 틀에서 담고 있다는 것이다.
「남이리면 향약계 성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김계속, 김동춘, 조석빈, 김인구, 김명구 등 33명의 계원을 수록한 명단이고, 둘째는 남이리면 향약계의 결성 사유 및 과정 그리고 자금 관리·사용에 대한 규약이며, 마지막은 나중에 변경된 22명의 면(面)내 계원을 수록한 명단인데, 이는 관인(官印)이 찍히지 않았다는 점에서 관(官)과는 무관하게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22명은 33명 중의 20명과 새로 추가된 2명을 말한다.).
「남이리면향약계」 계원 명부
「남이리면향약계」 계원 명부 2
그중 두 번째의 규약 내용은 3가지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이리면향약계」 규약
「남이리면향약계」 규약 2
1항은 향약의 의미, 남이리면 향약계의 결성 사유와 그 과정, 향약 계원에게 당부하는 지침 등을 수록하고 있다. 즉, 향약의 의미는 교화敎化를 확고하게 세워 선善을 드러내고 악惡을 징계하는 것[勸善懲惡]이다. 여지승람의 「강릉·풍속」에 옛날 강릉은 예약(禮藥)·문물(文物)이 융성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마을의 어른들이 아름다운 풍속이 점점 몰락하여 그대로 행해지지 않은 것을 매우 두려워하고 개탄하던 중 다행히 올봄에 현명한 성주(城主, 강릉부사)를 만나서 향약계를 결성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한 마을[面]에서 권선징악하는 아름다운 풍속은 한 고을[鄕]의 아름다운 풍속이 되니, 남이리면의 대소 인원들은 각자 성찰하여 한결같이 약속을 준수하고, 태만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참고로, 위에서 인용하고 있는 여지승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학문을 숭상한다. 【다박머리 아동 때부터 책을 끼고 스승을 따른다. 글 읽는 소리가 마을에 가득히 들리며, 게으름 부리는 자는 여럿이 함께 나무라고 꾸짖는다.……예의(禮義)를 서로 먼저 한다.……청춘경로회(靑春敬老會) 고을 풍속이 늙은이를 공경하여, 매양 좋은 절후를 만나면 나이 70 이상 된 자를 청하여 경치 좋은 곳에 모셔놓고 위로한다.……지금까지 없어지지 않았으며, 비록 노부의 천한 사람이라도 나이 70 된 자는 모두 모임에 오도록 하고 있다.】(『국역신증동국여지승』44권, 「강원도」, 「강릉대도호부·풍속」, 한국고전번역원, 1996.)
2항은 향약계의 자금 관리 규약이다. 즉, 관(강릉부)에서 나온 5냥과 각 계원이 수합(收合)한 10냥, 즉 총 15냥을 직월(直月, 향교의 간사)과 리정(里正, 마을의 촌장)이 맡아 다스려서 3푼(월 3%)의 이자로 재물을 불리라는[殖利] 것이다.
3항은 향약계의 자금 사용 규약이다. 즉, 이자 4냥 5전(연 30%) 중에서 3냥으로 봄과 가을에 강신(講信, 성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우의와 신의를 새롭게 다짐하며 대화하는 것)할 때에 탁료(濁醪, 막걸리) 2동이, 감주(甘酒) 1동이를 마련하고, 1냥 5전은 향약 계원의 경조사에 부조하여 약조에 따라 써야 할 일에 꼭 사용하라는 것이다.
이상에서 눈여겨 볼 사항은 남이리면 향약계가 강릉부사를 만나 결성된 것과 「남이리면 향약계 성책」의 각 면에 강릉부사의 관인인 ‘대도호부사지인(大都護府使之印)’이 찍힌 것 그리고 강릉부로부터 향약계의 발전을 위한 장려금 5냥을 받은 것 등으로 볼 때 남이리면 향약계는 강릉부사의 승인하에 결성·시행되었다는 것이고, 아울러 향약 계원으로 기록된 강릉김씨 노가니 김진사댁의 35세世 김명구(金命九, 1807∼1881)의 생몰년으로 볼 때 그 작성 시기가 대략 19세기 중후반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남이리면 향약계 성첩」은 19세기 조선에서 향약 사회에 보급된 향약이 지방관에 의해 결성·시행되고, 이때 지방관이 직접 향약절목을 마련하여 각 면(面)에 지시하며, 아울러 장려금을 면(面) 단위로 지급하던 그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 과거 강릉에서 그러한 향약계는 언제 시작되었고, 누가 그 기틀을 마련하였는가? 물론 그 시작 시기는 1857년(철종 8)이고, 그 기틀의 마련은 당시 강릉부사였던 류후조(柳厚祚, 1798~1876)이다.
1856년 류후조 간찰 Ⓒ 율곡연구원(기탁창녕조씨 명숙공 종가)
류후조는 자가 재가(載可), 호가 매산(梅山)·낙파(洛坡)·영매(嶺梅), 본관이 풍산(豊山)이다.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8대손으로 류심춘(柳尋春, 1762∼1834)의 아들이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류후조는 1855년(철종 6)에서 1858년(철종 9)까지 강릉부사로 재임하였고, 1858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한양으로 올라가서 부호군, 이조 참판, 공조 판서, 우의정 등을 지낸 인물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는 강릉부사 재임시기인 1857년(철종 8)에 향약의 보급을 위해 ‘향약절목’을 마련하여 ‘인심을 바르게 하고 풍속을 후하게 하라[正人心 厚風俗]’를 향약의 목적으로 시행케 하였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는 그 당시 21개 면(面)으로 구성되어 있던 강릉부의 각 면(面) 단위로 향약계를 조직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바로 「성산면향약절목(城山面鄕約節目)」과 「정동면향약절목(丁洞面鄕約節目)」(이 두 절목은 율곡연구원의 ‘향토고전번역총서5 : 강릉지방 향약·계 자료(2013)에 번역됨) 등이 그것이다.
이상으로 본다면 「남이리계 향약계 성첩」은 19세기 후반 당시 강릉의 향약계가 강릉부사에 의해 면(面) 단위까지 결성·시행되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남이리계 향약계 성첩」처럼 과거 강릉의 각 면(面)에서 작성된 향약계 관련 자료들이 모두 모아진다면 이를 통해 그 당시 강릉의 향촌사회에서 결성된 향약계의 전체적인 규모와 각 면(面)에서 활약한 향약계원들의 구체적인 모습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많은 강릉의 향약계 관련 자료들이 발견되기를 기대해 본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 「향약」 조, 「유후조」 조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encykorea.aks.ac.kr/
『강릉지방 향약·계 자료』(향토고전번역총서 5), 사)율곡학회, 2013.
『국역신증동국여지승람』44권, 「강원도」, 「강릉대도호부·풍속」, 한국고전번역원, 1996.
|
| 이전 | 간찰에서 역사의 흔적을 찾다 -율곡 이이의 간찰, 고균 김옥균의 간찰 |
|---|---|
| 다음 | 주인을 배반한 노비[叛奴]에 대한 처분을 묻다 –강릉 청풍당 건립자 권계학의 수신 간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