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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찰에서 역사의 흔적을 찾다 -율곡 이이의 간찰, 고균 김옥균의 간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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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운(율곡연구원)
간찰簡札과 유자최근儒者最近
‘유자(儒者)에게 가장 가까운 것[儒者最近]’은 무엇일까? 송나라의 정명도(程明道)의 『이정전서(二程全書)』「유서(遺書)」에 의하면 그것은 ‘글과 간찰[書札]’인데, 그는 글과 간찰이란 유자에게 가장 가까운 것이기는 하지만 오직 그것만을 좋아하고 집착하면 학문의 도(道)를 구하는 뜻을 잃어버린다고 강조한다.
명도 정 선생이 말하였다. 明道程先生曰, 자제의 가볍고 준수함을 염려하는 것은 憂子弟之輕俊者 다만 경전을 공부하고[經學] 책을 읽도록[念書] 가르쳐야지 只敎以經學念書, 글을 짓게 해서는 안 된다. 不得令作文字. 제들이 빠져서 좋아하는 것들은 모두 뜻을 빼앗는 것이다. 子弟凡百玩好皆奪志, 글과 간찰[書札]에 이르 러서는 至於書札, 유자(儒者)의 일에 가장 가까우나 , 於儒者事最近, 한결같이 (그것만을) 좋아하고 집착하면 또한 스스로 뜻을 잃게 된다. 然一向好著 亦自喪志.
정명도(『역대군신도상』) Ⓒ율곡연구원.jpg
물론 여기서 정명도의 말은 발신자와 수신자 간에 일상의 안부를 묻고 소식 및 용무 등을 전하는 간찰의 중요성을 간과한 것이 아니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학문의 도(道)을 구하기 위한 경학과 독서를 멀리한 채 오직 글을 짓는 행위만을 일삼는다면 궁극적으로 본성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다시는 “잃어버린 마음을 구할 수 없다.[求放心.]”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글과 간찰은 유자에게 가장 가까운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오직 유자의 학문 정진에 있어서 보조적 ‘수단’이 되어야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유자최근’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특히 오늘날 ‘편지’를 의미하는 ‘간찰’은 옛사람들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간찰 속에서 살았다고 할 정도로 현재 개인의 문집 속에, 또는 낱장 및 서첩의 형태 등으로 아주 많은 수가 전해지고 있다. 현재 율곡연구원의 수장고에 있는 많은 간찰들도 그러한 형태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 내용들을 보더라도 대체로 ‘신년 인사와 일상의 근황, 건강함과 무탈함, 천재지변의 피해와 복구, 낙향 후의 근황과 심경, 선물에 대한 감사, 경조사의 전후 이야기, 벼슬살이의 근황과 심경, 산수 유람에 대한 소회, 토지의 매매 방도 문의, 질병의 고통 호소, 노비들의 모반을 처리한 절차와 방법, 흉년을 당한 심경, 시를 읊은 소회, 특정 사건에 대한 의견, 농사에 대한 계획, 양자(養子)의 주선, 족보의 수정, 약재 처방, 청탁, 학문적 토론 등 우리의 실질적인 삶의 이야기들이 아주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이렇듯이 ‘간찰’은 단순히 일상의 안부를 묻고 여러 소식을 전하는 것에서부터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2∼1571)과 고붕(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처럼 학문적 토론에까지 활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는 간찰은 현재 사상, 역사, 경제, 사회, 문학 등 여러 방면에서 연구 자료로 활용되고 있는데, 그래서 간찰 안에 담긴 역사적 흔적을 찾아가는 것도 개인의 삶을 포함한 역사의 진실을 향해 한 발짝 더 가깝게 다가서는 것이 아닐는지?
율곡 이이의 간찰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7∼1584)의 간찰은 전주이씨 선교장 소장본으로, 나정언(羅廷彦: 1558∼?)이 보고한 것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킨 경원(慶源)의 오랑캐[胡人] 처리 문제’와 ‘전쟁에 따른 병력과 군량의 문제’ 및 ‘전쟁을 일으킨 오랭캐들의 부락에 대한 세밀한 탐정’ 등 전체적인 전시 상황을 탐지하여 아뢰라는 내용이다.
경원(慶源)에 사는 호인(胡人)으로 서울에서 돌아온 자는 慶源胡人, 自京回還者, 拘留械送, 형틀을 채워 보내어 拘留械送, 함흥 감옥에 잘 가두는 일은 于咸興獄堅囚事, 추후에 분명 임금의 유지(有旨)가 내릴 것이니 隨後必有旨, 우선 가두시오 先可囚禁, 기타 북방 변경의 오랑캐들은 他餘藩胡, 두 후대하여 보내시오. 皆厚待以送, 적의 형세는 멀리서 헤아리기 어려운데 賊勢難以遙度, 만약 병력을 나누어 지킬 수 없었다면 若兵力不能 分守, 어찌 일찍이 계속 들여보내 힘을 합쳐 견고히 지킬 계책을 쓰지 않는 것이오? 則何不早行疊入, 幷力 堅守之計乎. 군량이 모두 떨어졌으면 軍糧乏絶, 마땅히 형편에 따라 수송해서 써야지 則自當隨便輸用 어찌 단지 다 떨어졌다고 고하기만 한단 말이오? 何以只告罄乏乎, 지금의 반란을 일으킨 오랑캐는 어느어느 부락(部落)이오? 今之叛胡是某某部落乎 상세히 탐지하여 아뢰시오. 細探以啓. 나정언(羅廷彦)이 보고한 것을 羅廷彦所捧 춘양절[입춘]에 초하다 .春陽節草書
율곡 이이 간찰 Ⓒ 율곡연구원.jpg
그래서 이 간찰은 내용상 율곡이 병조판서로서 1583년에 일어난 ‘이탕개의 난’을 수습하던 당시 상황과 상당 부분 잘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선조의 명을 받은 율곡은 군사적으로 여진족을 경계하여 대비해야 한다는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주장하였다. 그 내용은 첫째 현능(賢能)을 임용할 것, 둘째 군민(軍民)을 양성할 것, 셋째 재용(財用)을 풍족하게 만들 것, 넷째 번병(藩屛)을 튼튼하게 할 것, 다섯째 전마(戰馬)를 갖출 것, 여섯째 교화(敎化)를 밝힐 것 등이었다. (『선조수정실록』17권, 선조 16년 2월 15일 무술 2번째 기사) 이러던 중 이탕개(尼湯介)를 중심으로 함경도 회령지방의 여진족[胡人]이 반란을 일으키자, 율곡은 북방에서 여진족과 싸우는 일을 지원하라는 선조의 명에 따라 사수(射手)들을 뽑아 북방으로 보내면서 군마(軍馬)를 바치는 사람의 균역(均役)을 면제해 주었다.
『선조수정실록』 17권, 선조 16년 5월 1일 임오 6번째 기사.jpg
이때 사수들을 선발하여 북방으로 보냈다. 율곡이 동료에게 의논하기를,“이전부터 수병(戍兵)들에게 말[馬] 없이 걸어가게 하였으므로 길 가는 사람들의 말을 약탈하여 의복 등 장비를 싣고 가는 폐단이 있었다. 이번에 선발한 군사는 세 등급으로 나눠지는데, 1등급은 정장(精壯)한 자로서 변방 방비에 충분하지만, 2·3 등급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니 말을 바치면 행역(行役)을 면제시키는 조건으로 모집하면 공사(公私)간에 다 좋을 것이다.”라고 하니, 의논하는 이가 모두 옳다고 하였다. 이때 군사를 출발시킬 시일이 임박하였으므로, 한편으로 임금에게 계청하여 윤허를 받고 한편으로는 영을 내려 바치는 자들을 모집하게 하여 일이 지체됨이 없게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7권, 선조 16년 5월 1일 임오 6번째 기사.jpg)
하지만 ‘이탕개의 난’이 평정된 이후에 율곡 이이가 선조를 기만(欺瞞)했다는 이유로 그의 행동을 비난하며 탄핵을 주청하는 동인을 비롯한 많은 조정 관리들의 상소가 빗발쳤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1583년 선조의 부름을 받고 입궐하던 율곡 이이가 갑자기 현기증을 호소하는데, 결국 선조를 알현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선조수정실록󰡕 17권, 선조 16년 6월 1일 신해 1번째 기사) 또 하나는 전마(戰馬)를 바치는 사람의 균역을 면제해 주었는데 이를 선조에게 미리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거듭되는 탄핵 상소를 인하여 선조는 그를 병조판서에서 물러나게 하였으나 몇 달 뒤에 다시 그를 불러들여 이조판서에 제수하였다. 결국 율곡은 당시의 열악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도 이탕개의 난을 포함해 함경도를 함락하려는 여진족을 방비하기 위해 병사들을 양성하거나 페정(弊政)을 개혁하기 위한 시무책 등을 올리는 등 자신의 책무를 다하였는데, 아쉽게도 다음 해인 1584년 1월 16일 한양 대사동(大寺洞 : 현 인사동 부근)에서 4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고균 김옥균의 간찰
고균(古筠)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의 간찰은 안동권씨 청풍당 소장본으로, 그 자신이 지인에게 안부를 묻고 현기증과 감기로 자리에 누워 괴로워하는 자신의 근황 등을 전하면서 식사 후에 자신을 찾아와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요즈음 부모님 모시며 더욱 건강하시리라 생각하니 伏惟日來. 侍體益旺. 溸祝. 그립습니다. 저는 부모님 모시며 편안하게 지내 다행이지만, 弟省安是幸. 근래 현기증과 감기로 자리에 누워 괴로워하고 있으니 而近以眩症與感氣. 貼席叫苦. 자신을 딱하게 여긴들 어찌하겠습니까. 自憐奈何. 아주 간절하게 상의할 일이 있어 이렇게 고하니, 果有 万切商確事. 玆專告. 식사하신 뒤에 즉시 찾아주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飰後卽日 賁臨如何. 손을 이마에 얹고 절하며 예를 갖추지 못하고 올립니다. 餘以手加額. 不備上. 즉일에 옥균 올림 卽. 弟玉均拜.
고균 김옥균 간찰 Ⓒ 율곡연구원.png
김옥균 간찰 필간.png
이 간찰은 내용이 너무 간략해서 김옥균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보냈는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전혀 담고 있지 않다. 다만 단편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즉 청풍당 집안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이 편지는 김옥균이 청풍당의 지인에게 보낸 것이고, 그 후에 첩의 형태로 ‘갑자년 중하에 장정한 서첩[歲在甲子仲夏粧帖] 필간(筆簡) 김옥균 씀(金玉均 書)’이란 표제를 붙여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해 왔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편지의 내용 중에 “아주 간절하게 상의할 일이 있어 이렇게 고하니, 식사하신 뒤에 즉시 찾아주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는 말은 김옥균의 거주지가 청풍당에서 거의 하루 정도면 충분히 갔다 올 수 있는 거리에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도 있다.
김옥균 사진 Ⓒ e뮤지엄.png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과연 김옥균은 언제, 어떻게 청풍당 사람들과 교유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놓고 볼 때, 김옥균과 청풍당의 인연은 양부인 김병기(金炳基, 1814∼?)의 관직 생활과 깊은 관련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옥균은 6살 때 친부의 6촌 형 김병기에게 양자로 들어가 성장하였는데, 특히 김병기는 1867년(고종 4)에서 1877년(고종 14)까지 양양부사를 역임하였으며, 몇년 후인 1880년 3월에서 1882년 7월까지 강릉부사도 역임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김병기가 양양부사로 임명되고 두 해 뒤인 1869년 8월에 오죽헌과 해운정을 동시에 방문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설악산 비선대에 그의 이름과 아들 옥균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볼 때 김옥균이 김병기의 양양부사 취임 이후에 일정 기간 그곳에 살았다고 추정할 수 있는데, 엄밀하게 말해 그 시기는 대략 김병기가 양양부사로 취임한 1867년(김옥균 16세) 이후부터 김옥균이 일성시(謁聖試, 임금이 성균관의 문묘에 참배한 뒤 실시되었던 문과·무과 시험) 문과에 장원급제한 1872년(김옥균 21세) 이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단순한 내용을 가진 간찰 하나만으로 율곡이 처한 시대적 배경을 파악한다든지 또는 김옥균이 영동지역에 몇 년을 머물다 상경했는지(물론 누구와 교류했는지를 파악하는 것에는 많은 무리가 따를 수도 있겠지만) 등을 유추할 수 있다. 이처럼 간찰들을 통해서 퍼즐 조각처럼 흩어져 있는 선인들의 삶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맞추어 나간다면 그들의 삶의 진실에 한층 더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여기에 간찰을 읽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임호민, 『전주이씨 선교장Ⅱ』, 강원국학자료총서 2, 율곡연구원, 2020. 12. 28. 임호민, 『안동권씨 청풍당』, 강원국학자료총서 4, 율곡연구원, 2022. 12. 26. 정항교 역, 『완역 증수임영지』, 강릉문화원, 2021년 12월 31일 개정판.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고종실록』. 『오죽헌 심헌록』. 『해운정 역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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