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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 천석 이야기 6 : 천석의 주인인 이생원은 다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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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진(율곡연구원)
1879년 노비인 충복이 주인인 이씨를 대리해서 논, 밭, 집, 집터를 환퇴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A003_01_A00691_001문서가 그때 체결된 계약서다.
이 문기는 이 씨의 종 충복이 긴요하게 쓸 곳이 있어서 매입했던 밭 12곳과 논 9곳, 기와집 등의 건물과 집터를 ‘되찾는다[환퇴]’는 조건으로 서울에 사는 금득의 상전인 김 씨에게 파는 내용이다. 매도하는 밭은 북이리면(北二里面) 임당리(林塘里)에 있는 동자(冬字) 자호의 33분번(分番)·3분번·36번·개간밭[加田] 2곳·30번·31번·28번, 북이리면 산황리(山篁里)에 있는 율자(律字) 자호의 을모년 개간밭 1짐·정모년 개간밭·병모년 개간밭·정모년 개간밭인데, 위 밭들의 면적은 결부수를 기준으로 총 20짐이고, 두락수를 기준으로 10섬지기이다. 논은 북이리면 성곡리(聲谷里)에 있는 장자(莊字) 자호의 110번·108번·74번, 비호석(非呼石)에 있는 양자(陽字) 자호의 14번, 사근곡(沙斤谷)에 있는 국자(國字) 자호의 25번, 횡산(橫山)에 있는 상자(霜字) 자호의 28번·29번, 배구랑(排仇郞)에 있는 조자(朝字) 자호의 82번, 송암(松巖)에 있는 강자(薑字) 자호의 61번 논으로, 위 논들의 면적은 결부수를 기준으로 총 36짐 6뭇이고, 두락수를 기준으로 7섬 5마지기이다. 이외에 기와집 11칸과 행랑 및 초가 5칸, 집터 5짐 2뭇이 매도의 대상이다. 충복은 위 매도물의 매도가로 금득의 상전에게 2,800냥을 받고 나중에 본가(本價)대로 환퇴한다는 조건으로 위 명문을 작성하여 발급해 주었으며, 위 매도물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구문기[舊文券]는 대소가(大小家)의 분재문서에 다른 분재대상과 함께 기재되어 있어서 넘겨주지 못하였다. 문서 말미에 ‘나중에 허튼소리를 한다면 이 문서로 관에서 빙고하여 바로잡을 것’이라는 내용의 추탈담보문언을 명기하고, 매도당사자인 충복이 수촌(手寸)으로 서명하였으며, 위 거래증인과 명문 작성자인 필집(筆執)은 생략하였다.
이 문서에는 전답과 집터의 주인이 강릉 반곡에 거주하는 이노 충복으로 되어 있다. "田畓及家垈主江陵盤谷李奴忠福" 상전댁이라는 말도 빠져 있다. "吾以要用所致" 그러나 충복은 매매의 대리인일 뿐이다. 문기 뒷부분에 있는 "以大小家衿給記幷付"라는 글 때문에 이렇게 추정할 수 있다. 깃급기는 깃급문기, 즉 재산을 분배한 내용을 기록한 분재기다. 대소가에서 유산으로 받은 내용이 아울러 붙어 있기 때문에 구문기를 줄 수 없다는 뜻이다. 이용구 이봉구 형제 이후로 선교장에서는 집을 대택과 소택으로 나눠서 경영했다. 즉, 토지와 주택 그리고 재산을 모두 나눠서 관리했다. 물론 하나의 가족이라는 울타리 아래서 공동으로 관리했다. 따라서 이곳의 대소가는 선교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충복 자신의 집안은 아닐 것이다. 계약이 이뤄진 시점인 1879년 즈음에 작성된 호구단자가 있다면 충복이 선교장의 노비였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선교장의 호구단자는 1843년의 것이 마지막이다. 달리 근거를 찾을 방법이 없을까?
차노를 시켜 계약을 대리할 때는 대리인에게 위임장을 발급해서 계약을 성사시키도록 했다. A003_01_A00752_001문서는 충복에게 상사화(上沙火), 곧 현재의 사천면 사천진리에 있는 95번 답의 매도를 위임한 패지, 패자, 배지, 배라 등으로 불리 위임장이다.
차노 충복에게
다른 일이 아니라, 상전댁에서 이매환토하기 위해 상사화에 있는 빈자 95번 분답 5부 8속, 한섬지기 땅을 모인에게 60냥을 받고 다음 해부터 그로 하여금 영원히 경작토록 하되, 본문기는 오래되어 다른 문서가 같이 붙어 있으므로 발급하지 못하는 바, 뒷날에 자손족류 중에서 다른 말을 하는 일이 있으면 이것으로 증빙을 삼을 일이다.
충복은 차노였다. 그러나 그는 선교장의 차노는 아니었다. 1829년 논 매매 계약서(문서번호 A003_01_A00384_001)는 직전의 패지에 따라 이뤄진 계약의 내용을 담고 있는 문서다. 이곳에서 충복은 하씨의 노라고 명확하게 표기되어 있다. 그는 선교장의 차노가 아니었다.
1879년에 이뤄진 계약의 대리인인 충복과 1829년에 계약의 대리인인 충복은 다른 인물이다. 충복이 선교장의 노비였다는 분명한 근거는 없다. 그러나 큰 댁과 작은 댁을 구분하고 있는 것은 꽤 증거력이 높은 근거다. 문서번호 A003_01_B00012_001 문서는 대택의 전답과 도지 등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성책문서에는 대택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다. 충복은 1870년대에 선교장의 차노로 활동했던 인물로서 1879년에 있었던 환퇴계약시에 주인을 대리해서 계약을 진행하면서, 주인이 필요한 이유라고 하지 않고 자신이 필요한 이유로라고 적었다. 1843년에 있었던 계약에서 천석도, 그가 자신을 매매대상인 노비의 주인이라 하고 자신이 쓸 곳이 있어서라고 했지만, 사실은 대리인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생원의 노'라고 했지만 천석을 생원시에 입격한 이용구의 노비로 단정할 것도 아니다. 천석은 강릉에 거주하는 다른 이생원의 노비였을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생원과 진사라는 호칭에는 거품이 끼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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