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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포산에 선조를 모시기까지 : 청풍당의 산송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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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록(율곡국학진흥원)
1. 밤중에 갑자기 생긴 무덤
1892년(고종 29), 청풍당의 가주 권영진(權永鎭, 1859~1934, 개명 전 權遠植)은 증조부 권기영(權基榮, 1782~1812)의 묘를 하남면(河南面) 순포리(蓴浦里) 즉, 현재 사천면(沙川面) 산대월리(山帶月里)로 이장하려 했다. 청풍당은 이미 묏자리를 정하고 길일도 잡아 두었다. 발괄[白活]에는 이장 날짜가 “이달 보름 무렵”으로 적혀 있고, 간찰에는 “지난해 10월 10일”로도 기록되어 있다. 자료마다 날짜 표현은 조금 다르지만, 청풍당이 1892년 10월 중순 무렵 권기영의 묘를 이장하려 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장을 준비하던 중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9월 7일, 산 아래 집터에 살던 김씨 양반이 찾아와 “9월 4일 밤에 어떤 자가 청풍당에서 정해 둔 자리에 몰래 묘를 썼다”고 알려온 것이다. 급히 가서 살펴보니, 과연 그곳에는 조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작은 봉분이 있었다. 흙빛이 아직 붉은 새 무덤이었다. 투장(偸葬)이었다. 투장은 남의 산이나 이미 정해진 묏자리에 몰래 장사 지내는 행위를 말한다. 선조를 모시려던 자리는 하루아침에 산송(山訟)의 현장이 되었다.
2. 순포리 땅의 매입
산송이 시작된 해는 1892년이지만, 이 이야기의 배경은 1884년(고종 21)의 토지 매매에서 시작된다. 1884년 권씨댁의 종 후종(後種)은 오죽헌 권씨댁의 종 삼복(三福)에게 하남면 순포리 일대의 토지를 팔았다. 조선시대의 관행을 고려하면, 실제 거래의 주체는 노비들이 아니라 그들의 상전인 권씨들이었다.
1884년 권노 후종 밭 매매 문기(權奴 後種 田賣買文記)
매매 대상은 단순한 밭 몇 곳이 아니었다. 순포리 일대의 밭, 솔밭, 닥밭, 과일나무, 집터, 작은 산기슭이 함께 포함되었다. 문서에는 매수자가 오죽헌 권씨댁으로 나타난다. 이 매매 문기가 청풍당에 전해지고, 이후 산송의 주체가 청풍당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때 토지를 사들인 쪽은 오죽헌 권씨의 소종(小宗)인 청풍당으로 볼 수 있다. 청풍당은 오죽헌에서 갈라져 나온 가문으로, 오죽헌과 함께 죽헌파에 속했기 때문에 오죽헌 권씨로 불릴 수 있었다. 청풍당은 이때 단순한 경작지만 확보한 것이 아니었다. 집터, 솔밭, 닥밭, 작은 산기슭이 함께 있는 공간을 사들였다. 훗날 선영을 조성할 수 있는 물리적 조건이 이미 이 매매 안에 들어 있었던 셈이다. 또 문서에는 훗날 자손 가운데 다른 말[雜談]을 하는 자가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거로 삼으라[憑考]는 문구까지 적혀 있었다. 따라서 이 매매문서는 단순한 토지 거래 문서가 아니라, 훗날 산송에서 “이 땅은 문서로 확보한 땅”임을 보여주는 권리의 출발점이 되었다.
토지 매매 문기에 따르면 청풍당이 구입한 대상은 다음과 같다. 순포의 양자 30번 밭 1복 3속, 계자 가전(加田) 3속, 환기전(還起田) 1복, 같은 들 월봉(越峰) 북쪽의 계자 가전 3속, 90번 환기전 1복, 집터에 딸린 계자 가전 3속을 합하여 모두 4복 2속이었다. 여기에 솔밭과 닥밭, 과일나무 세 그루, 북성(北城) 황봉로(隍峰路) 동쪽 쌍한정(雙閒亭) 왕래길 위 서쪽의 작은 산기슭 한 곳이 더해졌다. 밭의 넓이는 모두 4부 2속, 곧 0.042결이었다. 결부법은 토지의 실제 면적이 아니라 수확량과 과세 능력을 기준으로 삼는 방식이므로 현대 면적으로 정확히 환산하기는 어렵지만, 대략 500평 이하의 밭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집터와 솔밭, 닥밭, 과일나무, 작은 산기슭이 함께 붙어 있었다. 매매가는 95냥이었는데, 『장서각 수집 물가사 자료 해제 및 통계』에 의하면 전남 장흥에서는 1880년대 쌀 한 섬의 가격이 대략 10냥 정도에 해당했다고 한다.① 이 기준으로 보면 95냥은 쌀 약 9.5섬에 해당한다. 1섬을 약 144kg으로 잡으면, 오늘날 무게로는 약 1.4톤가량의 쌀값에 해당한다.
① 전성호, 『장서각 수집 물가사 자료 해제 및 통계』, 민속원, 2008.
3. 노 삼복이 발괄을 올리다
투장을 확인한 청풍당은 곧바로 관에 청원하였다. 이때 앞에 나선 인물은 앞서 토지 매매에도 등장했던 노 삼복이었다. 양반가의 노비 가운데 상전을 대신하여 대외 업무와 문서 활동을 맡는 사내종을 호노(戶奴)라고 한다. 호노는 상전을 대신해 매매를 주관하거나 관에 청원서를 올리는 역할을 하였다. 삼복은 청풍당의 호노로서 발괄을 올렸다. 발괄은 소지(所志)류 문서의 하나로, 이 사건에서는 노비가 상전을 대신하여 관에 올린 청원문이었다. 삼복은 상전댁의 솔밭과 집터가 하남면 순포리에 있으며, 상전이 선산을 옮기려는 뜻으로 그 산의 솔밭 자리에 묏자리를 정하고 길일까지 잡아 두었는데, 누군가가 그 자리에 몰래 묘를 썼다고 호소하였다. 사정은 절박했다. 무덤 주인을 사방으로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했고, 그렇다고 주인 없는 무덤을 사사로이 파낼 수도 없었다. 이에 삼복은 관에서 장교(將校)를 정하여 투장한 무덤을 파내어 옮겨 달라고 청원하였다.(A004_01_A00426_001)
1892년 권노 삼복 발괄(權奴 三福 白活)
당시 법전인 『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투장과 관련된 조항이 있었다. 하나는 사대부가 남의 묘지에 불법으로 무덤을 쓰는 일을 금지하고, 이를 어기면 여염집을 빼앗아 들어간 것과 같은 죄로 다스린다는 내용이다.③ 다른 하나는 투장의 원상복구에 관한 조항으로, 법을 어기고 투장한 경우에는 발굴하여 이장하게 하며, 주인의 산소나 인가 근처에 투장한 뒤 100일 안에 투장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산주가 관에 고발하고, 관에서 파내어 옮길 수 있다는 내용이다.④ 청풍당의 사건이 이 조항에 해당한다면, 투장이 일어난 시점은 1892년 9월 4일이므로 100일 안에 투장자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 관에 신고하여 이장할 수 있었다. 삼복이 발괄을 올린 시점은 10월이었으므로, 관에서는 조금 더 기다린 뒤 관굴을 명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강릉부의 판단은 청풍당이 바라는 방향과 달랐다. 당시 강릉부사 김정진(金靖鎭)은 뎨김[題辭]에서 “무덤 주인이 없는데 관에서 파내는 것 또한 법 밖의 일이다. 다시 널리 찾아보고 소장을 올릴 일이다”라고 판결하였다. 강릉부는 왜 이 사건을 해결하기 주저했을까. 한 가지 가능성은 청풍당이 정한 묏자리가 문서로 매입한 경작지와 완전히 같은 성격의 토지가 아니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조선에서 산림은 '與民共之', 즉 민과 함께 이용해야 하는 토지로서 사점(私占)이 금지되어 소유권을 획득할 수 없었다.⑤ 산림을 사적으로 점유하는 가장 확실한 방식은 분묘를 조성하여 산소(山所)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청풍당은 아직 실제 산소를 쓰기 전이었다. 따라서 관의 입장에서는 이 자리를 청풍당이 이미 배타적으로 점유한 묘역으로 인정하기 어려웠을 수 있다.
사대부의 분묘는 그 품계에 따라 사점할 수 있는 보수(步數)가 정해져 있었다. 이때 금지된 구역은 서울 성 밖 10리 이내와 인가가 있는 곳의 100보 이내 뿐이었고, 경작 중인 땅을 매장을 위해 금지시킬 수 없었을 뿐이다. 이러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일반적인 문무관은 묘역을 조성한다는 명분으로 1품은 사방 각 90보, 2품은 80보, 3품은 70보, 4품은 60보, 5품은 50보, 6품이하 생원(生員), 진사(進士), 음직의 자제[有蔭子弟] 까지는 40보의 영역을 점유할 수 있었다.⑥ 하지만 청풍당은 아직 산소를 쓰기 이전이므로 해당 법규에 의해 보호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피해는 분명했지만, 처리는 간단하지 않았다. 투장은 불법이었지만, 무덤을 파내는 행위 역시 법과 절차를 필요로 했다. 청풍당의 산송은 억울함과 절차 사이에서 멈춰 섰다. 청풍당은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② 전경목, 「양반가에서의 노비 역할 -전라도 부안의 우반동김씨가의 사례를 중심으로-」, 『지방사와 지방문화』15, 역사문화학회, 2012.
③ 『大典會通』, 「刑典 · 聽理 · 士大夫勒葬誘葬偸葬」.
④ 『大典會通』, 「刑典 · 聽理 · 偸葬依法掘移」.
⑤ Aoi, Hitomi, 「19세기 산림 이용 확대와 산송의 증가」,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22.
⑥『大典會通』, 「禮典 · 喪葬 · 墳墓定限」.
4. 억울함과 정의로움의 사이에서
청풍당이 찾은 활로는 인맥이었다. 당시 강릉부사는 김정진이었다. 청풍당은 김정진의 조카 김종한(金宗漢)과 팔촌동생 김학진(金鶴鎭)을 통해 이 문제를 다시 호소하였다. 관련 자료 가운데에는 강릉부사에게 보낼 간찰의 초본으로 보이는 문서도 남아 있다. 이 초본은 청풍당의 입장에서 사건의 억울함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앞서 삼복이 올린 발괄과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A006_01_A00102_001)
1893년 간찰 초본
다만 간찰 초본은 단순한 억울함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 사건을 그대로 두면 투장의 폐단이 잇따라 일어나고, 패악한 풍습이 번져 질서가 무너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청풍당은 한 집안의 피해를 사회적 폐단의 문제로 확대해 말하고 있었다. 김종한과 김학진은 각각 자신의 논리와 관계를 바탕으로 강릉부사 김정진을 설득하고자 하였다. 먼저 김종한은 투장을 “몰래 장사 지내고 흔적을 숨긴 패악한 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를 엄히 징계하지 않으면 투장의 폐단이 심해져 사람들이 장사지낼 땅조차 얻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A006_01_A00713_001)
1893년 김종한 간찰(金宗漢 簡札)
반면 김학진은 보다 직접적인 청탁의 형식을 취하였다. 그는 승정원 관직에 매여 있는 자신의 형편을 말한 뒤, 오죽헌에 사는 권원식이 고 대사간 권종륜(權鍾崙)의 손자이며, 순포리에 집터와 솔밭을 사두고 이장하려 했으나 누군가가 그 자리에 투장했다고 설명하였다. 이어 편지가 도착하면 곧 관에서 파내어 권원식이 편안히 안장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특히 그는 이 일이 “친숙한 사람의 일”이므로 의례적인 부탁으로 돌리지 말라고 당부하였다.(A006_01_A00103_001)
1893년 김학진 간찰(金鶴鎭 簡札)
당시 산송은 지역 수령이 일차적으로 판단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인맥을 통해 사정을 호소하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청풍당은 법의 절차가 멈춘 자리에서 인맥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사적 청탁만은 아니었다. 청풍당에게 이 사건은 한 집안의 억울함을 넘어, 투장의 폐단을 막아야 할 공적 문제이기도 했다.
5. 관권이 개입하다
김종한과 김학진의 간찰이 강릉부사 김정진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는 남은 자료만으로는 확인하기 어렵다. 이후 사건의 흐름은 1897년(고종 34)의 전령(傳令)에서 다시 확인된다. 1897년 4월 26일, 강릉 지방관은 하남면 순포리의 두민(頭民)과 파견 장교에게 전령을 내렸다. 전령은 관부(官府)에서 하급 관리나 백성에게 명령 사항을 전달하는 문서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곧 들으니, 정동면 오죽헌 권 좌랑 집에서 안장하기 위해 몇 해 전에 본면 순포리에 집터를 사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 안장하는 날, 해당 동리의 주민들이 까닭 없이 방해하여 장례가 낭패에 이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하니, 보고 듣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이에 특별히 명령하여 신칙하고, 장교를 내보내니, 동민들에게 하나하나 깨우쳐 타일러 폐단 없이 장례를 호위하도록 하라. 혹시라도 끝까지 방해하는 자가 있거든 이름을 지목하여 잡아 올려, 법에 따라 엄히 처분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
1897년 강릉부사 전령(傳令)
여기에서 사건의 양상이 바뀐다. 처음에는 상대가 “누군지 모르는 투장자”였다. 그런데 1897년에는 순포리 주민들이 장례를 방해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산송은 이제 청풍당과 정체 불명의 투장자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을 넘어, 청풍당과 순포리 주민들 사이의 갈등으로 번지고 있었다. 이 사이의 시간을 정확히 복원하기는 어렵다. 다만 1897년 전령이 “이번 안장일”의 방해를 문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청풍당은 다시 길일을 정하여 이장을 추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순포리 주민들이 물리적으로 장례를 방해했다는 사실은, 이 사건이 문서 위의 소송만이 아니라 현장에서 충돌한 분쟁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사이의 시간을 추측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기간을 특정할 수는 없으나 청풍당의 주장이 관부에 받아들여져 투장된 묘는 발굴 혹은 이장되었을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같은 자리 혹은 지근거리에 다시금 길일을 정해서 이장을 계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투장한 자가 누구였는지는 끝내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1897년 전령에서 순포리 주민들이 장례를 방해한 사실을 보면, 이 사건이 단순히 청풍당과 정체불명의 투장자 사이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순포리 마을과의 긴장 속에서 전개되었을 가능성은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청풍당이 묘역을 조성하려던 산림은 그동안 순포리 주민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던 공간이었을 수 있다. 조선시대 산림은 일반적으로 사적 소유와 매매가 제한되는 공간이었고, 지역민의 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동면에 살던 양반가가 순포리 일대에 집터와 밭, 솔밭, 작은 산기슭을 매입하고, 여기에 선영을 조성하려 한 일은 순포리 주민들에게는 자신들이 관습적으로 이용해 온 산림의 이용 방식이 바뀌거나 제한될 수 있는 일로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있다. 청풍당 측이 내세운 신분적 근거도 이 갈등을 키웠을 수 있다. 권원식은 고 대사간 권종륜(權鍾崙, 1813~1888)의 손자이자, 전 도사 권학수(權學洙, 1831~1906)의 아들로 설명되었다. 이 같은 신분적 배경은 청풍당이 묘역 조성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지만, 반대로 지역 주민들에게는 지역 주민들의 눈에는 외부 양반가가 관권과 인맥을 통해 마을 주변 산림을 선영의 공간으로 바꾸려는 일로 보였을 여지도 있다.
6. 결국 성공한 이장과 명당
이 사건의 중심에 있던 권기영은 청풍당을 세운 권계학(權啓學, 1716~1788)의 증손이며, 산송을 청원한 권영진의 증조부이다. 권기영의 묘를 둘러싼 이 산송은 결국 이장 성공으로 귀결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권기영의 묘소가 사천면 산대월리 산24-1 건좌에 자리한 것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권기영의 묘소가 현재 해당 지역에 자리한다는 사실은, 1892년부터 1897년까지 이어진 청풍당의 이장이 우여곡절 끝에 성사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왜 청풍당은 여러 선조가 묻힌 정동면의 기존 선영이 아니라 하남면 순포리로 권기영의 묘를 옮기려 했을까. 사료는 그 이유를 직접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순포산이 당대 지역사회에서 장지로 주목되었을 가능성은 생각해 볼 수 있다. 청풍당 소장 고문서는 아니지만, ‘순포산(蓴浦山)’의 산세와 방위, 좌향 등을 검토한 풍수 음양 기록이 남아 있다.(B005_01_A00432_001) 이는 순포산 일대가 특정 문중만의 관심지가 아니라, 지역사회 안에서 묘산으로 거론될 만한 장소였음을 시사한다.
순포산(蓴浦山) 풍수 관련 기록
이 점을 고려하면 청풍당의 순포리 이장은 단순히 산림을 점유하려는 시도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청풍당은 이미 1884년에 순포리 일대의 밭과 집터, 솔밭, 닥밭, 과일나무 등을 사들였고, 그 주변 산림을 증조부 권기영의 장지로 삼으려 하였다. 여기에 순포산이 당대에 장지로 주목될 만한 산이었다면, 청풍당에게 이곳은 경제적 토지 기반과 풍수적 기대가 겹친 장소였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 비교 사료가 곧바로 청풍당의 선택 이유를 밝혀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순포산이 아무 의미 없는 임의의 산이 아니었을 가능성, 곧 당대 사람들에게 묘산으로 상상될 수 있었던 장소였다는 점은 말해 준다. 따라서 권기영의 이장은 공유 산림을 둘러싼 이해관계의 문제인 동시에, 좋은 산을 골라 선조를 모시려는 신종추원의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청풍당의 산송은 한 가지 이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 안에는 선조를 좋은 터에 모시려는 신종추원의 마음, 순포산을 둘러싼 풍수적 기대, 마을 산림을 둘러싼 관습적 이용, 그리고 이를 조정하려는 관권의 판단이 함께 얽혀 있었다. 밤중에 생긴 작은 붉은 무덤 하나는, 조선 말기 지역사회에서 묘역과 산림, 문중의 기억이 어떻게 충돌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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