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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송(山訟)에 문중의 사활을 걸다 -조윤목과 김정유의 묘지 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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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운(율곡연구원)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면서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사람 간에 다양한 형태로 일어나는 분쟁은 거의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분쟁은 때론 개인 차원에서 서로 간의 나쁜 감정을 풀어버리는 ‘화해’로 일단락되기도 하고, 물리적인 수단이나 힘을 통한 돌이킬 수 없는 ‘폭력’ 사태로 비화 되기도 하며, 법률상의 판결을 법원에 요구하는 송사로 해결되기도 한다. 이 중에서 분쟁의 해결은 첫 번째가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고, 두 번째는 반드시 지양되어야 할 방법일 것이다. 문제는 분쟁의 내용이 개인들의 명운을 가를 권리 획득과 직결된 것이라 한다면 세 번째의 송사만큼 분쟁을 해결할 좋은 방법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송사가 사람들의 실생활에 미치는 막대한 영향을 고려할 때, 되도록이면 송사를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을지도 모른다. 먼 옛날이야기지만, 공자의 다음의 말은 시사해 주는 바가 아주 크다고 할 수 있다.
송사를 듣고 판결하는 것은 나도 남들과 다름이 없겠지만, 반드시 해야 할 것은 송사가 없게 하는 것이다.(論語, 「顏淵」, 子曰 “聽訟吾猶人也. 必也使無訟乎.”)
간단하게 말해, 송사는 처음부터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송사는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꾸미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시간에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다양한 이유로 자시들의 권리 획득을 위해서 자신의 생활을 담보로 하여 황금 같은 시간을 상당히 허비하면서까지 송사에 매달리고 있다.
물론 과거에도 오늘날처럼 문중이나 개인의 권리 획득을 위한 송사가 아주 빈번하게 일어났다. 특히 조선시대 3대 사송(詞訟 : 노비, 전답, 산송) 중 하나인 ‘묘지 소송’으로 불리는 ‘산송(山訟)’, 즉 불법으로 남의 땅에 무덤을 몰래 쓰는 ‘투장(偸葬) 관련 소송은 조선 후기 전체 소송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로 불려왔다. 왜냐하면 금장자(禁葬者)가 어떠한 이유를 들더라도 그는 투장자의 묘를 임의적으로 파내어 결코 처분할 수 없었고, 반드시 관청의 판결을 기다려야만 하였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관청에서 ‘산송’의 판결을 신속하게 내렸다고 하더라도 투장자가 얼토당토한 이유를 들면서까지 묘를 이장하지 않았다면 이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싸움으로 번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산송은 금장자와 투장자 둘 모두에게 ‘고발’과 ‘약속 불이행’이 계속 반복되는 기나긴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예컨대, 영조(英祖)의 중재에도 해결하지 못한 파평윤씨와 청송심씨 두 문중이 거의 300년 동안 진행한 ‘산송’이 가장 대표적이다.
그러한 ‘산송’ 관련 고문서가 강릉에서 ‘서지뜰’로 널리 알려진 ‘창녕조씨 명숙공종가’에 여러 장이 소장되어 있는데, 그중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은 1820년에 정동(丁洞)에 거주하는 화민(化民) 조윤목(曺允睦)과 사화면(沙火面, 현 강릉시 沙川面)에 거주하는 김정유(金鼎裕, 22세) 사이에 벌어진 ‘산송’이었다. 이 산송은 김정유가 불법적으로 자신의 부친 묘를 조윤목의 5대조 묘가 있는 사화면 노동蘆洞 소재의 선산에 몰래 쓴 ‘투장’에 대해 조윤목이 강릉대도호부에 소송을 제기하면서 시작되었다.
1820년 산도(A004_01_A00431_001)
이에 대해 강릉대도호부에서는 담당아전 이병식(李秉軾)을 필두로 원고 조윤목과 피고 김정유 등을 현장에 함께 보내 산송 대상인 두 무덤의 위치와 무덤을 둘러싼 산줄기를 확인할 수 있는 산도(山圖, 묏자리를 표시한 그림)를 그려오게 하였다. 그들은 조윤목의 5대조 무덤의 위치를 해좌사향(亥坐巳向, 동남향)으로 표기하고, 김정유의 부친 무덤은 유좌묘향(酉坐卯向, 동향)으로 표기하며, 두 무덤 사이는 97보 5치로 앉거나 섰을 때 서로 보이지는 않은 거리임을 명시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이름과 서명을 수록하였다. 그리하여 강릉부사는 이것에 근거하여 12월 20일에 다음과 같이 판결을 내렸다.
이 산의 형세를 살펴보니 (김정유 부친묘 위치가) 이미 조윤목 분산(墳山)의 백호(白虎, 산줄기의 오른쪽) 100보 안이고, 또 금양(禁養, 산의 나무나 풀을 함부로 베지 못하게 금지하여 가꿈)하는 곳이다. 김정유가 투장하여 이루어진 분형(墳形, 묘의 형태)임을 또 추측할 수 있으니, 내년(신사년, 1821년) 봄을 기다렸다가 바로 이장(移葬)하는 것이 마땅하다.
소송에서 패소한 김정유는 강릉대도부사의 내년 봄 이후에 이장하라는 판결대로 1820년 12월 20일에 ‘내년 봄 이후[開春後]에 부친의 무덤을 이장하겠다고 약속하고, 만약 이 약속 기한을 넘긴다면 자신을 엄히 가두고 독굴(督掘, 분묘를 독촉하여 파냄)할 것을 다짐한다.’라는 내용의 다짐[侤音]을 강릉부에 제출하였다. 여기서 엄밀히 본다면 김정유의 ‘다짐’에는 그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어느정도 숨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1820년 김정유 다짐(A004_01_A00429_001)
앞서 보았듯이 금장자는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간에 금장자가 투장자의 묘를 결코 파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1821년에 가서도 김정유는 자신의 부모 묘를 이장하겠다는 조윤목과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추측컨대, 조윤목은 개인 차원에서 봄철 이후에 김정유에게 약속을 이행하라고 여러 차례 주문했을 것이고, 김정유는 3월과 9월은 풍수상 묘를 이장하지 않는다는 기존 속설 등을 이유로 부모 묘의 이장을 차일피일 미루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아마도 조윤목은 김정유의 이장 약속 불이행에 대해 강릉대도호부에 재소송을 했을 것인데, 아쉽게도 이와 관련된 문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김정유가 2번째 ‘다짐’을 작성한 사실이나 ‘다짐’ 중의 “누차 관청의 소송에서 졌다.[屢次官庭落科.]”라는 글로 볼 때 조윤목이 강릉대도호부에 김정유의 이장 약속불이행을 다시 한번 고발했음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아무튼, 조윤복에게 누차 패소한 김정유는 1821년 11월 7일에 ‘내년(임오년 1822년) 2월 안(二月內)에 자신 부친의 무덤을 이장(移葬)하 되, 이 약속기한을 넘긴다면 자신을 엄히 가두고 독굴(督掘, 무덤을 독촉하여 파냄)할 것을 다짐한다.’라는 내용의 다짐을 다시 한번 강릉부에 제출하였다.
1821년 김정유 다짐(A004_01_A00430_001)
이 두 번째의 ‘다짐’은 첫 번째의 ‘다짐’과 내용상 차이가 거의 없지만 “누차 관청의 소송에서 졌다.[屢次官庭落科.]”라는 말에서 보듯이 거듭되는 소송의 패소에 부담을 느꼈는지 “내년(임오년 1822년) 2월 안(二月內)”이라고 하여 첫 번째의 ‘다짐’에서 보다 구체적인 날짜를 명시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조윤목과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조윤목의 아들인 화민(化民) 조환진(曺桓振)이 나서서 1822년 윤3월 7일에 이장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김정유를 상대로 강릉도호부에 상서(上書, 민원서인 소지류(所志類))를 올렸다. 그 내용은 애초에 김정유가 투장(偸葬)한 것 자체가 이미 법을 범한 것이고, 기한을 넘기면서 무덤을 파내지 않은 것은 관의 명령을 도외시하는 것이므로, 관에서 차사(差使)를 보내 김정유를 붙잡아 옥에 가두고 즉시 무덤을 파냄으로써 한편으로 완악한 백성의 교활한 습속을 징계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요청이었다.
1822년 조환진 상서(A004_01_A00513_001)
이에 대해 강릉도호부사는 조환진의 차사를 보내달라고 하는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조환진에게 “(김정유의) 다짐을 받아내기 위해 그를 붙잡아 오라.[捧侤次捉來事.]”라는 지시를 내렸다. 아쉽게도 이 산송은 그 뒤를 잇는 문서가 발견되지 않아서 어떻게 끝맺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기타 산송의 결말처럼 그들은 여러 해 동안 산송에 자신들의 시간을 상당히 허비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결국 금장자가 16세기 이후 성리학적 의례의 정착과 종법 질서의 확립 과정에서 부계 분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등장했던 묘지 소송인 ‘산송’에서 이겼다고 하더라도 금장자의 선산에서 투장자의 묘를 이장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즉, 투장자는 묘를 이장하지 않고서 말이 되는 않은 이유를 들어 계속 버티면서 묘지 이장을 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금장자는 ‘소장을 내는 사람(呈訴者)’을 계속 바꾸어 가면서 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앞서 보듯이, 김정유가 산송의 패소 뒤에 두 번의 ’다짐‘을 통해서 자기 부친의 묘를 이장하기로 약속했지만 계속해서 이행하지 않았던 사실과 조윤목 집안에서 소장을 관청에 내는 사람을 바꾸어 가면서까지 소송을 제기하였던 사실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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