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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2년 류영하 간찰(柳榮河 簡札)
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4_01_A00736_001
- ㆍ입수처
- 창녕조씨 명숙공종가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842년 류영하 간찰 / 柳榮河 簡札
- ㆍ발급자
-
류영하(柳榮河, 1787~1868, 조선, 개인)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심능규(沈能圭, 1790~1862, 조선, 개인)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 ㆍ형태정보
-
점수: 1크기: 24.3 × 12.8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율곡연구원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 ㆍ수장고
- 이름: 서가위치: 단위치:
해제
1842년 류영하(柳榮河, 1787~1868)가 심능규(沈能圭, 1790~1862)에게 보낸 간찰이다. 발신자의 성명이 따로 기재되어 있지 않으나, 류영하의 다른 간찰의 필체와 같으므로, 그를 발신자로 판단하였다. 그는 자는 선여(善汝), 호는 보산(甫山), 본관은 고흥(高興)이다. 춘천(春川) 출신으로 뒤에 가평(加平)으로 이주하였다. 181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안변부사(安邊府使), 대사간, 공조참판 등에 임명되었다. 특히 1841년 1월 3일에 강릉부사에 임명되어 2월에 부임하였고, 1842년 6월에 파직됐다. 김평묵(金平默, 1819~1891)이 지은 행장(行狀)에 의하면, 그는 1842년에 감사의 뜻을 거슬러 인사 평정에서 중고(中考)를 맞고 그 즉시 직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수신자는 창녕조씨 명숙공종가 소장 간찰 가운데 강릉부사가 보낸 다른 편지들을 참고하여 심능규로 판단하였다. 그는 강릉에 거주한 사족이다. 자는 사룡(士龍), 호는 호은(湖隱)ㆍ신천당(信天堂)ㆍ천청당(天聽堂)ㆍ월포(月圃), 본관은 삼척이다. 저서에 월포기(月圃記), 인경부주(仁經附註)가 있다. 이 간찰은 류영하가 강릉부사를 그만두고 돌아가면서 작별을 알리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먼저 류영하는 금강록(金剛錄)을 조금 전에 잘 돌려보냈다고 하였다. 이 금강록은 심능규의 시문집인 월포기에 서문만 수록되어 있는 금강록시집(金剛錄詩集)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심능규가 1831년 4월 무렵에 금강산을 유람하고 지은 시를 모은 시집이다. 그리고 조지(朝紙)가 오지 않았다고 했는데, 심능규가 류영하에게 조보를 보여 달라고 부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어 전최(殿最)에서 감사가 자신에 대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였다.[不事事]”라는 제목(題目)을 부여했다고 전하였다. 일성록(日省錄)에 의하면, 이해에 강원감사 장교근(張敎根)은 “읍은 한결같이 어쩜 그리 피폐한가. 부사는 또한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였다.[一何弊弊 又不事事]”라고 평하고 중고(中考)에 두었다. 끝으로 이별의 회포를 펴지 못한 것에 대해 유감을 표하고, 가을에 열릴 과거에서 심능규가 급제하기를 바란다고 하며 편지를 끝맺었다. 강릉 창녕조씨 소장 고문서의 상당 부분이 심능규 등 삼척심씨 인물과 관련된 것인데, 조옥현 가의 외가가 삼척심씨이므로 어느 시기에 다량의 삼척심씨 소장 문서가 조옥현 가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최호, 수집사료해제집7, 국사편찬위원회, 2013)
- · 최호, 수집사료해제집7, 국사편찬위원회, 2013
참고자료
원문
俄者修候告別未及入照也金剛錄俄已還完矣朝紙不來殿最弟則以不事事爲題耳未得敍別悵悵惟冀秋場嵬捷不備謝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