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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 조석삼 시권(曺錫三 試券)
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4_01_A00582_001
- ㆍ입수처
- 창녕조씨 명숙공종가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증빙류-시권(試券)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887년 조석삼 시권 / 曺錫三 試券
- ㆍ발급자
-
조석삼(曺錫三)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 ㆍ형태정보
-
점수: 1크기: 64.9 × 155.6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1887년 강릉(江陵)에 거주하는 85세의 조석삼(曺錫三)의 진사시(進士試) 초시(初試) 시권(詩卷)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율곡연구원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 ㆍ수장고
- 이름: 서가위치: 단위치:
해제
1. 「조석삼(曺錫三, 85세)의 1887년(고종 24) 진사시 초시 ‘원호상자 자손창성 원호하자 세숙민자(願乎上者 子孫昌盛 願乎下者 歲熟民滋)’시(詩) 시권(詩卷)」 해제
【시권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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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권 개요】
이 문서는 강릉(江陵)에 거주하는 85세의 조석삼(曺錫三)이 1887년(고종 24) 진사시(進士試) 초시(初試)에서 시(詩)를 지어서 써 낸 시권(詩卷)이다.
【시권 해설】
이 시권(試券)의 작성자는 강릉에 거주하는 85세의 조석삼(曺錫三; 1803∼?)이고, 작성 시기는 1887년(고종 24, 정해년)이며, 응시한 과거시험은 진사시 초시이다.
조석삼은 그 당시 유학(幼學)의 신분이었다. 이 ‘유학’이라는 말은 ‘무위 무관(無位無官)의 선비’를 뜻하며, 나이의 많고 적음과는 상관이 없다. 후술하는 조석삼의 진사시 복시 시권과 관련 『사마방목(司馬榜目)』(『사마방목(司馬榜目)』 : 이의 정식 명칭은 『숭정기원후5무자 식년 사마방목(崇禎紀元後五戊子式年司馬榜目)』이다.) 등을 참조해보면, 조석삼은 그 이듬해인 1888년(고종 25, 무자년)에 86세의 나이로 식년 진사시에 합격함(1888년(고종 25, 무자년)에 86세의 나이로 식년 진사시에 합격함 : 『사마방목』〔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에 의하면 조석삼의 생년이 ‘갑자년’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이 생년은 조석삼의 진사시 복시 부(賦) 시권의 비봉(秘封)에 기재된 응시 당시의 나이 86세에 비추어볼 때 ‘갑자년’은 그 전해인 ‘정해년’이어야 옳다. 따라서 이 『사마방목』의 기재 ‘갑자년’은 방목 작성 당시 한 해 차이의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1888년(고종 25, 무자년) 86세’를 기준으로 조석삼의 출생 연도를 역산하면 그것은 곧 1803년(순조 3, 정해년)이다. 더구나 위 『사마방목』에서는 조석삼의 출생연도 ‘갑자년’을 1864년(고종 1)으로 한 갑자 늦추어 파악한 나머지 조석삼의 진사시 합격 연령을 ‘25세’라고 함으로써 거듭 오류를 범하였다. 이는 모두 조석삼의 해당 시권을 검토해보지 못한 결과라 할 것이다.)으로써 유학의 신분을 벗어났다.
과거시험의 종류의 종류는 진사시이고 그 단계는 초시이다. 진사시라는 근거는 고시과목이 시라는 점이다. 참고로 말하면 시는 문과에서는 고시(考試)하지 않고 진사시에서만 고시한다. 그 단계가 초시라 함은 조석삼이 이 시험에 응시하였을 때의 연령이 85세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 이듬해인 86세 때 식년 진사시 복시에 합격하였다. 식년시의 경우 식년 전 해의 가을에 초시를 치르고 당해 식년(‘식년(式年)’이란 태세(太歲)가 자(子)·묘(卯)·오(午)·유(酉)에 있는 해인데, 3년마다 드는 이러한 해에 나라에서는 정규적으로 호적을 조사·정리하고 과거(科擧)를 설행하는 것으로 법식으로 정하였다.)의 봄에 복시를 치르므로, 조석삼은 무자년의 식년 진사시에 합격하기 전인 85세 당시 정해년 가을에 이 시험을 초시의 단계로 치렀다고 할 수 있다.
시의 제목은 ‘원호상자 자손창성 원호하자 세숙민자(願乎上者, 子孫昌盛, 願乎下者, 歲熟民滋.)’인데, 이는 “위로 원하는 것은 자손의 창성이요 아래로 원하는 것은 농사의 풍년과 백성들의 불어남이다.”라는 뜻이다.
이 시험의 제목[試題]이자 시의 제목[詩題]인 이 말의 출처는 남송 때의 학자 동래(東萊) 여조겸(呂祖謙; 1137-1181)의 『여씨가숙 독시기(呂氏家塾讀詩記)』이다. 거기에서 여조겸은 “『시경』 「소아(小雅)」의 「사간(斯干)」편과 「무양(無羊)」편의 마지막 장(章)을 가지고 살펴보자면, 위로 원하는 것은 자손의 창성이요 아래로 원하는 것은 농사의 풍년과 백성들의 불어남이니, 그 밖에는 모두 원하는 것이 아니다. 저 진(秦)나라·한(漢)나라의 큰일 벌이기를 좋아한 임금들은 이러한 일들로써 소원을 삼으려 하였겠는가.”(『시경』 「소아(小雅)」의 …… 하였겠는가 : 〔『呂氏家塾讀詩記』 권12, 「祈父之什」, “東萊曰, 以斯干無羊之卒章觀之, 所願乎上者, 子孫昌盛, 所願乎下者, 歳熟民滋, 皆不願乎其外也. 彼秦漢好大喜功之主, 肯以是爲可願哉.”〕)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이 과시를 제대로 잘 짓기 위해서는 『시경』 「소아」의 「사간」편과 「무양」편의 내용은 물론, 위 여조겸의 말까지도 훤히 알고 있어야 함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고시과목은 시(詩)이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에서 고시하는 시를 보통 과시(科詩)라 이른다. 이는 제술시험[글짓기 시험] 과목의 한 가지로 그 나름의 정형성을 지닌 칠언 장편의 고체시[古詩]이며, 조선후기에 이르러 대략 18련의 길이로 고정되었다. 시는 진사시의 초시·복시와 진사시의 초시에 가름하는 각종 시험에서 고시하였다. 대개 경사(經史)의 구절, 옛사람의 시구, 고사성어 등에서 따온 말로써 시의 제목으로 삼았다. 제목 중의 한 글자에 낙점(落點)하여 운자(韻字)로 삼고, 한 가지 운만 사용하였다.[환운(換韻) 불가] 시제 중에서 낙점한 운자를 한 번 사용하되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대개 제4련의 끝에 그 글자를 놓았다.
본 시권의 과시 작품은 운자가 ‘願(원)’이다. 이 ‘願(원)’은 거성(去聲)의 글자로, 거성 제14번의 운목(韻目) 글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과시에서는 매 련(聯)의 끝 글자, 곧 매 짝수 구의 끝 글자에 ‘원(願)’과 동일한 운부(韻部)에 속하는 글자로써 운을 달았으되, 운자로 제시된 ‘원(願)’자는 그 당시의 관행대로 제4련의 끝에 놓았다. 작품 전체의 길이는 18련이다.
작품의 내용은 대개 시제에 제시된 여조겸의 말을 부연하여 서술하면서 조선의 국왕 및 왕실의 덕을 칭송·찬양하고 수복과 번창을 축원한 것으로, 『시경』 「소아」의 「사간」편과 「무양」편은 물론, 『시경』 소재의 여러 시, 그 밖에 『서경』, 『예기』, 『주역』, 『춘추좌씨전』, 『사기(史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등의 다양한 문헌을 인용하여 전거로 사용함으로써 작자 자신의 주장에 정당성과 설득력을 강화하였다.
이 과시를 채점한 결과인 성적 곧 과차(科次)는 ‘차하(次下)’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次下’라는 과차 표기 옆에 다시 조그맣게 ‘외(外)’라는 글자를 부기하여 세부 분류를 해놓았다. 이 ‘차하’는 15개의 과차 등급 즉 ‘상상·상중·상하, 중상·중중·중하, 하상·하중·하하, 차상·차중·차하·갱(更)·외(外)·위(違)’ 중 열두 번째의 등급에 해당한다. 과차는 원래 ‘하하’ 이상을 합격권으로 치고, ‘차상’ 이하를 불합격으로 처리함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합격 인원수를 다 채우지 못할 경우에는 차상 이하의 과차에서도 선발하였으므로, 조석삼은 차하의 성적으로 합격권에 들게 되었던 것이다.
등제(等第) 곧 합격 석차는 표기되어 있지 않으므로, 미상이다. 여기에서 참고로 첨언하면, 시권 이미지 사진 ‘A004_01_A00582_001_001.jpg’ 곧 ‘유학 조석삼 진사 2등 제4인(幼學曺錫三進士二等第四人)’이라는 황첨(黃籤; 황색 첨지) 사진은 조석삼의 이 진사시 초시 시권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 황첨은 애당초 조석삼의 1888년(고종 25, 무자년) 진사시 복시 시권에 첨부되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시권 우측 상단의 신원(身元) 기재란 부분을 비봉(秘封)이라 이르는데, 이 시권에는 비봉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이에 조석삼 본인의 신분·성명·나이·본관·거주지와 사조(四祖; 부·조·증조·외조)의 관함·성명 등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이 비봉의 기재에 의하면, 조석삼은 유학(幼學)의 신분으로, 나이가 85세이고, 본관이 창녕(昌寧)이며, 거주지가 강릉이다. 그의 아버지는 조환진(曺桓振), 할아버지는 조윤목(曺允睦), 증조할아버지는 조명숙(曺命肅), 외할아버지는 강릉최씨 최인국(崔仁國)인데, 이들의 신분은 모두 학생(學生)이다. 이 ‘학생’도 ‘유학’과 같은 말로, ‘벼슬을 하지 못한 유생(儒生)’을 이른다.
비봉은 일반적으로 채점 시 잘라내어 따라 보관하였다가[할거(割去)] 채점이 끝난 뒤 도로 붙여봄으로써 채점의 공정을 기하였는데, 이 시권의 경우 그리하지 않았다.
본 시권에는 시권의 제출 순번이자 관리 번호인 자호(字號)가 매겨져 있지 않다. 본 시권은 애당초 자호도 매기지 않았고 그로 인해 채점 시 비봉을 할거도 하지 않았는데, 이로써 미루어볼 때 당시 시관들의 시권 관리가 다소 느슨하였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관련 시권】
이 시권과 함께 조석삼이 86세 때 치른 1888년(고종 25, 무자년)의 진사시 복시 시권도 같이 보존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 두 시권을 아울러 살펴봄으로써 조석삼의 진사시 초시·복시의 응시 및 합격 상황을 좀 더 구체적이면서도 명확하게 살펴볼 수 있다.
조석삼의 진사시 복시 시권 이미지 번호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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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석삼(曺錫三, 86세)의 1888년(고종 25) 진사시 복시 ‘방춘화시(方春和時)’부 시권」 해제
【시권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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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권 개요】
이 문서는 강릉(江陵)에 거주하는 86세의 조석삼(曺錫三)이 1888년(고종 25) 식년 진사시(式年進士試) 복시(覆試)에서 부(賦)를 지어서 써 낸 시권(詩卷)이다.
【시권 해설】
이 시권(試券)의 작성자는 강릉에 거주하는 86세의 창녕조씨(昌寧曺氏) 조석삼(曺錫三; 1803∼?)이고, 작성 시기는 1888년(고종 25, 무자년)이며, 응시한 과거시험은 식년 진사시 복시이다.
조석삼은 이 시험의 응시 시 유학(幼學)의 신분이었다. 이 ‘유학’이라는 말은 ‘무위 무관(無位無官)의 선비’를 뜻하며, 나이의 많고 적음과는 상관이 없다. 조석삼의 이 식년 진사시 복시 시권과 해당 『사마방목(司馬榜目)』(이의 정식 명칭은 『숭정기원후5무자 식년 사마방목(崇禎紀元後五戊子式年司馬榜目)』이다.) 등을 참조해보면, 조석삼은 무자년인 1888년(고종 25)에 86세의 나이로 식년 진사시에 합격함(무자년인 1888년(고종 25)에 86세의 나이로 식년 진사시에 합격함 : 이 사항에 대해서는 「조석삼(曺錫三, 85세)의 1887년(고종 24) 진사시 초시 ‘원호상자 자손창성 원호하자 세숙민자(願乎上者 子孫昌盛 願乎下者 歲熟民滋)’시(詩) 시권(詩卷)」 해제를 참조할 것.)으로써 유학의 신분을 벗어나서 비로소 진사의 신분을 얻었다.
응시한 시기는 식년(式年, ‘식년’이란 지지(地支)에 자(子)·묘(卯)·오(午)·유(酉)가 들어있는 해인데, 3년마다 드는 이러한 해에 나라에서는 정규적으로 호적을 조사·정리하고 과거(科擧)를 설행하는 것으로 법식으로 정하였다.)인 무자년(1888; 고종 25)이고, 당시 조석삼의 연령은 86세였다. 그 시기와 연령은 시권의 비봉(秘封) 부분에 명기되어 있다. 이 시권에는 다행하게도 비봉과 시제(試題) 사이의 공란에 이 과거시험의 설행 연월일과 장소, 주관한 시관 5인의 직위와 성명을 추기(追記)해 놓았다. 이에 의하면 그 시기는 무자년(1888) 2월 19일이고, 장소는 이소(二所)이며, 시관은 상시관(上試官) 정범조(鄭範朝), 부시관(副試官) 김만식(金萬植) 등이다. 이 추기는 이 시험의 합격자 발표 후 당해 시권을 되돌려 받은 조석삼이 참고삼아 메모해둔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때 과거시험에 합격한 시권은 모두 관례상 합격자에게 되돌려 주었는데, 그 때 세심한 사람들은 당해 시험의 여러 정황들을 시권의 여백에 메모해두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과거시험의 종류는 진사시이고 그 단계는 복시이다. 진사시라는 근거는 고시과목이 시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말하면 시는 문과에서는 고시(考試)하지 않고 진사시에서만 고시하였다. 그 단계가 복시임은 『사마방목』의 기록 내용과 이 시권에 첨부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학 조석삼 진사 2등 제4인(幼學曺錫三進士二等第四人)’이라는 황첨(黃籤; 황색 첨지)―시권 이미지 사진 ‘A004_01_A00582_001_001.jpg―의 기재에 근거한 판단이다.
시의 제목[詩題]은 ‘방춘화시(方春和時)’인데, 이는 ‘바야흐로 봄빛이 화창한 시절’이라는 뜻이다. 이 시제(詩題)의 출처는 『전한서(前漢書)』 「문제기(文帝紀)」에 나오는 한문제(漢文帝)의 조서(詔書)이다. 이에 의하면 한문제는 그 원년인 기원전 179년 3월, 춘궁기를 맞아 곤궁한 백성들을 구제하는 문제에 대해 대책(對策)을 구하는 조서를 내렸다. 그 조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바야흐로 봄빛이 화창한 시절에 초목과 뭇 생물들이 모두 스스로 즐거워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백성들로서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과 곤궁한 사람들이 혹 죽음의 나락에 떨어지려고 하건만, 아무도 이를 보살펴 주지 않고 있다. 백성의 부모인 임금은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이들을 구제[振貸·賑貸]할 대책을 논의하라.(『前漢書』 권4, 「文帝紀」, “方春和時, 草木群生之物皆有以自樂, 而吾百姓鰥寡孤獨窮困之人或阽於死亡, 而莫之省,憂 爲民父母將何如, 其議所以振貸之.”)
고시과목은 부(賦)이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에서 고시하는 부를 통상 과부(科賦)라 이른다. 조선시대의 ‘과부’는 과거의 제술시험 과목 중 문학을 시험하기 위해 부과한 부(賦) 형식의 문체로, 압운(押韻)‧대우(對偶)‧평측(平仄)의 격식에서 자유로운 고부(古賦)에 속한다.
조선후기의 전형적 형식의 과부는 일반적으로 구말(句末)에 압운(押韻)을 하지 않으면서 1구(句)를 6언(言)으로 만들되 제4자에 허사(虛辭)를 사용하며, 그 길이는 대개 30련(聯)으로 구성하였다. 조석삼의 이 과부도 1구 6언의 30련으로 작성되었으며, 거의 모든 구에서 제4자에 ‘於’ ‘而’ ‘其’ ‘之’ 등의 허사를 사용하였다. 압운은 원칙적으로 하지 않았으나, 다만 제5·6련의 ‘春’·‘仁’, 제10·11련의 ‘何’·‘和’는 운을 맞춘 것이다. 대우의 강구 여부는 자유인데, 이 작품에서는 제2련·제4련·제9련·제12련·제18련·제24련·제26련·제28련·제29련 등에서 대우를 강구하였다. 평측은 물론 전혀 강구하지 않았다.
작품의 내용은 대개 시제(詩題)의 의미를 부연하여 서술하면서 한문제의 인정(仁政)과 공덕을 칭송·찬양한 것으로, 『전한서』 「문제기」의 관련 기사를 적극 인용한 외에 『주례』·『논어』·『예기』·『서경』·『중용』·『주역』·『사기』·『후한서』·『격양집』 등의 다양한 문헌에서 전거를 인용함으로써 작자 자신의 주장에 신빙성과 설득력을 강화하였다.
과차(科次; 채점 결과인 성적의 등급)는 ‘차상(次上)’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次上’이라는 과차 표기 옆에 다시 조그맣게 ‘외(外)’라는 글자를 부기하여 세부 분류를 해놓음으로써 동일 과차 내에서의 변별에 참고토록 하였다. ‘차상’은 15개의 과차 등급 즉 ‘상상·상중·상하, 중상·중중·중하, 하상·하중·하하, 차상·차중·차하·갱(更)·외(外)·위(違)’ 중 열 번째의 등급에 해당한다. 과차에서는 원래 ‘하하’ 이상을 합격권으로 치고, ‘차상’ 이하를 불합격으로 처리함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합격 인원수를 다 채우지 못할 경우에는 차상 이하의 과차에서도 합격자를 선발하였으므로, 조석삼은 차상의 성적으로 합격권에 들게 되었던 것이다.
등제(等第; 합격 석차)는 이 시권 상에 표기되어 있지 않다. 다만 이 시권에는 합격 시권에 대해 국왕의 재가를 받을 때 등제를 표기하여 붙인 황첨(黃籤)이 2개 보이는데, 그 시권 이미지 번호와 기재 내용은 아래와 같다.
‘A004_01_A00582_001_001.jpg’ “幼學曺錫三進士二等第四人” (A)
‘A004_01_A00582_001_007.jpg’ “進士試二等第五人” (B)
이들 (A) (B) 2개 중, (A)는 본 시권과 분리된 채 별도로 보관되어 있고, (B)는 본 시권의 시제 기재란 우측에 첨부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권과 관련된 해당 『사마방목』을 참조해 볼 때 (A)가 진정한 것이고, (B)는 이 시권과 무관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지금 (B)는 실제로 이 시권에 첨부되어 보존돼 있지만, 이는 후세에 어떤 사람이 잘못 표기된 내용의 것을 어뚱한 시권에 잘못 첨부한 것이라 판단된다. 당해 『사마방목』에 의하면 조석삼은 당시 진사 2등 도합 24인 중 제4인인데, 이는 (A)의 기재 내용과 일치한다. 당시 진사는 총 314인을 선발하였는데, 그 중 1등이 5인, 2등이 24인, 3등이 295인이었으므로, 조석삼의 전체 석차는 314인 중 제9위이다.
시권의 관리를 위해 시권의 제출 순서에 따라 매기는 자호(字號)도 이 시권에는 매겨져 있지 않다.
시권 우측 상단의 신원(身元) 기재란 부분을 비봉(秘封)이라 이르는데, 이 시권에는 비봉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이에 조석삼 본인의 신분·성명·나이·본관·거주지와 사조(四祖; 부·조·증조·외조)의 관함·성명 등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이 비봉의 기재에 의하면, 조석삼은 유학(幼學)의 신분으로, 나이가 86세이고, 본관이 창녕(昌寧)이며, 거주지가 강릉이다. 그의 아버지는 조환진(曺桓振), 할아버지는 조윤목(曺允睦), 증조할아버지는 조명숙(曺命肅), 외할아버지는 강릉최씨 최인국(崔仁國)인데, 이들의 신분은 모두 학생(學生)이다. 이 ‘학생’도 ‘유학’과 같은 말로, ‘벼슬을 하지 못한 유생(儒生)’을 이른다.
비봉은 일반적으로 채점 시 잘라내어 따라 보관하였다가[할거(割去)] 채점이 끝난 뒤 도로 붙여봄으로써 채점의 공정을 기하였는데, 이 시권의 경우 그렇게 하지는 않고 비봉이 밀봉 된 상태에서 채점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본 시권은 애당초 자호도 매기지 않았고 그로 인해 채점 시 비봉을 할거도 하지 않았는데, 이로써 미루어볼 때 당시 시관들의 시권 관리가 다소 느슨하였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관련 시권】
이 시권과 함께 조석삼이 85세 때 치른 1887년(고종 24, 정해년)의 진사시 초시 시권도 같이 보존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 두 시권을 아울러 살펴봄으로써 조석삼의 진사시 초시·복시의 응시 및 합격 상황을 좀 더 구체적이면서도 명확하게 살펴볼 수 있다.
조석삼의 진사시 초시 시권 이미지 번호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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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국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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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願乎上者 子孫昌盛 願乎下者 歲熟民滋’詩
01.蜡墉祈歲燕謨男,
報本祝答先王憲.
02.似續妣祖斯男百,
亦有黍稻乃倉萬.
03.如墉櫛比室家溱,
聖子神孫惇信勸.
04.維周聖世衆子孫,
歲熟民滋皆所願.
05.豳風敎穡稷劉化,
灃水貽謨文武遜.
06.釐之士女獲屢豐,
本固邦家民不遠.
07.無羊之末秩斯干,
祝頌洋洋恭以愿.
08.豊年衆魚大人占,
男子維熊祥夢獻.
09.臣隣嘏祝上下泰,
壽福人君體天健.
10.春郊弗子帶弓䪅,
夏宗祈年嘗黍飯.
11.王家大願不外是,
一世民生歸化圈.
12.多男華岳午會泰,
力穡殷家子惠困.
13.升平天地德堯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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耕鑿歌謠勞不怨.
14.公堂祈禱兕觥稱,
天子揚休虎首頓.
15.承承本支百世傳,
率土皇家先得寸.
16.禾麻並藝命亞旅,
男女相生占震巽.
17.明明在上赫赫下,
茂膺仁君志無悶.
18.由來聖德却不回,
百代宗祊延瓞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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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方春和時’賦
01.仰周政焉先四,
體羲元惟資萬.
02.掬吉兆於橫庚,
攬陽煦於建寅.
03.春三月而詔令,
時哉惟其和氣.
04.要賑貸於衆庶,
𥇕氤氳於節序.
05.朕方承於漢祚,
願與民而同春.
06.三章家而蒞位,
再讓地而行仁.
07.無疆休於曆服,
化可見於風草.
08.春宮穆其下詔,
眷我民欲賑撫.
09.危將阽於困窮,
治可做於泰世.
10.山東吏而布令,
問是時其惟何.
11.皇天平分四時,
最是春之陽和.
12.賓暘谷而出日,
律太簇而飛灰.
13.其神昊而按節,
欥中和爲庶幾.
14.相下民之計極,
何所獨無和也.
15.平章化於帝德,
錫保願於箕福.
16.東君儼其履端,
是月也而資物.
17.丁攝提於孟陬,
窅旭卉於首祚.
18.流元氣於敏蒲,
運至妙於化樞.
19.方群生之自樂,
此其時於星鳥.
20.卄四番而次第,
三六宮而都是.
21.靑陽闢以左介,
得氣像於春臺.
22.若鳥獸而舜世,
賁草木而湯后.
23.雙幹囿以百昌,
俾舞之而蹈之.
24.豐蔀暖於氣候,
泰陽回於山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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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流大漢之豈弟,
何莫非其爲美.
26.烟花濃於大地,
雨露沾於陽天.
27.機緘運以橐鑰,
在在春於吾民.
28.金膏溢於紫洞,
玉燭棲於玄都.
29.丁嘉辰而惠澤,
子庶民而洪休.
30.台千載而擊節,
賦一篇而興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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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원하는 것은 자손의 창성이요, 아래로 원하는 것은 농사의 풍년과 백성들의 불어남’1)이라는 시
01.성에서 여러 신에게 제사지내 풍년 빌고 아들에게 좋은 계책 주니2),
근본에 보답한다는 축관의 대답은 선왕의 전범(典範)이지.
02.윗대 조상을 이어서 사내아이 일백 명인데,
또한 기장과 벼가 있어서 창고가 일만 개이네.
03.성곽 같은 곡식 낟가리가 즐비하고 식구들이 무수히 많은데,3)
훌륭한 자손들에게 돈후하고 신실하기를 권면했다네.
04.주(周)나라 대대의 성왕(聖王)들은 자손을 많이 두었는데,
풍년이 드는 것과 백성들이 많이 느는 것을 모두 소원하였네.
05.빈풍(豳風)에서 농사 가르침은 후직(后稷)과 공류(公劉)의 교화요,4)
풍수(灃水)에서 좋은 교훈 자손에게 줌5)은 문왕 무왕의 겸손이네.
06.그에게 훌륭한 여사(女士)를 주고6) 거듭된 풍년을 거두니,
근본이 튼튼하여7) 나라·가정·백성의 평안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네.
07.「무양(無羊)」편 끝과 「사간(斯干)」편은
송축하는 뜻이 성대하였으니, 공손히 축원하였네.
08.태인(大人)의 점에 사람들이 물고기이면 풍년이 들고,8)
곰은 사내아이라 하여 상서로운 해몽을 올렸네.9)
09.신민들이 크게 축원하나니, 상하가 모두 태평하고,
하늘의 강건함을 본받아 임금님께서 수복을 누리시게 함이라.
10.봄날 교외에서는 자식을 보지 못하여 활집을 메었는데,10)
여름철의 조현(朝見)에서는 풍년을 빌고 기장밥을 맛보았네.
11.왕실의 큰 소원은 이 밖에 더 없으니,11)
한 시대의 백성들이 교화의 범위 안에 귀속하였네.
12.다남을 빈 화봉(華封)의 축사는 오회(午會)12)의 태평시대를 보였고,
농사에 힘쓴 은(殷)나라13)는 곤궁한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했지.14)
13.태평시대 천지와 같은 덕은 요(堯)임금이 닮았으니,
1) 위로 원하는 것 ∼ 불어남 : 이 과시(科詩)의 제목[試題]으로, 출처는 동래(東萊) 여조겸(呂祖謙)의 『여씨가숙 독시기(呂氏家塾讀詩記)』이다. 거기에서 여조겸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경』의 「사간(斯干)」편과 「무양(無羊)」편의 마지막 장(章)을 가지고 살펴보자면, 위로 원하는 것은 자손의 창성이요 아래로 원하는 것은 농사의 풍년과 백성들의 불어남이니, 그 밖에는 모두 원하지 않는 것이다. 저 진(秦)나라·한(漢)나라의 큰일 벌이기를 좋아한 임금들은 이러한 일들로써 소원을 삼으려 하였겠는가.”〔『呂氏家塾讀詩記』 권12, 「祈父之什」, “東萊曰, 以斯干無羊之卒章觀之, 所願乎上者, 子孫昌盛, 所願乎下者, 歳熟民滋, 皆不願乎其外也. 彼秦漢好大喜功之主, 肯以是爲可願哉.”〕
2) 좋은 계책 주니 : 원문 ‘燕謨(연모)’를 옮긴 말이다. 연익지모(燕翼之謨)의 준말로, ‘자손을 위한 좋은 계책’을 뜻한다. 『시경』 「대아(大雅)·문왕유성(文王有聲)」의 구절 “그 자손들에게 좋은 계책을 물려주고, 그 아들에게 편안함과 도움을 준다.[詒厥孫謀, 以燕翼子.]”에서 유래한 말이다.
3) 성곽 같은 ∼ 무수히 많은데 : 『시경』 「주송(周頌)·양사(良耜)」에 에서 인용한 말이다. 거기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예리한 보습을 들고 나가 비로소 남녘 밭을 갈고, 백곡의 씨를 파종하니 열매가 이에 싹터 나오네. …… 쓱쓱 곡식을 베어서 빽빽하게 쌓아 올리네. 높이가 성벽 같으며 촘촘하기가 빗살과 같으니, 큰 가문을 이루었네.〔畟畟良耜, 俶載南畝. 播厥百穀, 實函斯活. …… 穫之挃挃, 積之栗栗. 其崇如墉, 其比如櫛, 以開百室.〕”
4) 빈풍(豳風)에서 ∼ 교화요 : ‘빈풍’은 특히 『시경』 「빈풍(豳風)·칠월(七月)」을 이르는 말이다. 이 「칠월」은 주공(周公)이 지은 시로, 대개 ‘농사를 준비하고, 누에를 치고, 길쌈을 하고, 수확하고, 지붕을 이는 등의 일들을 월별로 읊은 것’인데, 성왕(成王)이 농사짓는 어려움을 알지 못하므로 주공이 주나라의 선조인 후직(后稷)과 공류(公劉)의 교화를 서술하여 소경인 악사(樂師)로 하여금 조석으로 이 시를 읊어서 성왕을 가르치게 하였다.
5) 풍수(灃水)에서 ∼ 자손에게 줌 : ‘좋은 교훈 자손에게 줌’은 원문 ‘貽謨(이모)’를 옮긴 말이다. ‘이모(貽謀)’와 같은 말로 ‘조상이 자손을 위해 좋은 계책을 남겨 줌’을 뜻한다. 이는 『시경』 「대아(大雅)·문왕유성(文王有聲)」의 구절에서 유래한 말이다. 거기에서 “풍수에도 기(芑)가 자라는데, 무왕(武王)이 어찌 이곳에서 종사하지 않으리오. 그 자손들에게 좋은 계책을 물려주고, 그 아들에게 편안함과 도움을 주니, 무왕은 참으로 임금답도다.[豐水有芑, 武王豈不仕. 詒厥孫謀, 以燕翼子, 武王烝哉.]”라고 읊었다. 원문의 ‘灃’은 ‘豐’과 통해서 쓴다.
6) 그에게 훌륭한 여사(女士)를 주고 : 『시경』 「대아(大雅)·기취(旣醉)」의 구절 “그 붙여줌은 무엇인가, 너에게 훌륭한 여사(女士)를 줌이라. 너에게 훌륭한 여사를 주고, 훌륭한 자손으로써 따르게 하리라.[其僕維何, 釐爾女士. 釐爾女士, 從以孫子.]”에서 인용한 말이다.
7) 근본이 튼튼하여 : 『서경』의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하면 나라가 평안하다.”라는 구절에서 따다 쓴 말이다.〔『書經』 「五子之歌」, “民惟邦本, 本固邦寧.”〕
8) 태인(大人)의 ∼ 풍년이 들고 : 『시경』 「소아(小雅)·무양(無羊)」의 구절 중 “태인이 점을 쳐보니, 사람들이 물고기가 됨은 실로 풍년이 들 조짐이다.[大人占之, 衆維魚矣, 實維豐年.]”라고 한 말을 인용한 표현이다. ‘태인(大人)’은 ‘꿈을 풀이하는 점몽관(占夢官)’을 이른다.
9) 곰은 사내아이라 ∼ 올렸네 : 『시경』 「소아(小雅)·사간(斯干)」」의 구절 중 “태인이 점을 쳐보니, 작은 곰과 큰 곰은 사내아이를 낳을 상서이다.[大人占之, 維熊維羆, 男子之祥.]”라고 한 말을 인용한 표현이다.
10) 봄날 교외에서는 ∼ 메었는데 : 『예기』 「월령」에 나오는 다음의 말을 따다가 인용한 것이다. “중춘의 달에 제비가 이른다. 이르는 날에 태뢰의 예물로 고매(高禖)에게 제사한다. 천자가 친히 제사지내러 가면 왕비가 9빈(嬪)과 모시는 여인들을 거느리고 가는데, 이때 천자를 모시고 잔 임신한 여인을 예우하여 고매의 앞에서 (생남을 기원하며) 활과 활집을 차게 하고 활과 화살을 준다.[是月也, 玄鳥至. 至之日, 以太牢祠于高禖. 天子親往, 后妃帥九嬪御, 乃禮天子所御, 帶以弓韣, 授以弓矢, 于高禖之前.]” ‘고매(高禖)’는 ‘매신(媒神)’인데, ‘교매(郊禖)’라고도 이른다. 동일한 취지의 말이 『시경』 「대아(大雅)·생민(生民)」의 주석에도 보인다.〔『詩經』 「大雅·生民」, “生民如何, 克禋克祀, 以弗無子. <注> 精意以享, 謂之禋, 祀, 祀郊禖也. 弗之言, 祓也. 祓無子, 求有子也. 古者, 立郊禖, 蓋祭天於郊而以先媒配也. 變媒言禖者, 神之也. 其禮以玄鳥至之日, 用大牢祀之, 天子親往, 后率九嬪御, 乃禮天子所御, 帶以弓韣, 授以弓矢, 于郊禖之前也.”〕
11) 왕실의 큰 소원 ∼ 없으니 : 동래 여조겸의 『여씨가숙 독시기』에서 인용한 말이다. 앞의 각주 1) 참조.
12) 오회(午會) : 대개 문물이 융성한 요순(堯舜)의 시대를 이른다. 북송 때 소옹(邵雍)의 원회운세(元會運世)의 설에 의하면, 역사의 연대를 계산하는 단위로 1세(世)를 30년, 12세 360년을 1운(運), 30운 10,800년을 1회(會), 12회 129,600년을 1원(元)이라 하였는데, 이 1원은 우주의 시간 속에서 지극히 짧은 한 단계에 해당한다. 또 1원 12회를 12지지(地支)와 연계시켜 자회(子會)에서 시작하여 중간인 오회를 거쳐 마지막인 해회(亥會)에 이른다고 하였으니, 자회에서 사회까지 그리고 오회에서 해회까지가 각 64,800년이다. 요(堯)임금이 즉위한 B.C. 2357년 갑진년이 사회(巳會)의 끝 무렵이고 그로부터 140년 뒤인 우(禹)임금 8년 갑자년부터 오회(午會)가 시작되었다 하였으니, 그 오회가 시작된 갑자년은 1원의 절반이 갓 지난 64,801년에 해당하는 해이다.
13) 농사에 힘쓴 은(殷)나라 : 『서경』 「반경」에 나오는 다음의 말을 따다가 인용한 것이다. “농부가 밭에서 일하여 농사에 힘써야 가을에 수확함이 있는 것과 같다.”〔『書經』 「盤庚上」, “若農服田力穡, 乃亦有秋.”〕
14) 곤궁한 백성들을 ∼ 사랑했지 : 『서경』 「태갑」에 나오는 다음의 말을 따다가 인용한 것이다. “선왕께서 곤궁한 사람들을 자식처럼 사랑하였으니, 백성들 치고 그 명에 복종하여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書經』 「太甲中」, “先王子惠困窮, 民服厥命. 罔有不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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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껏 일해 배불리 먹고 격양가 부르며 수고로움을 원망하지 않았네.
14.임금의 당에 올라 뿔 술잔을 들고 장수를 빌면서15)
양기(陽氣)로 만물을 길러주는 천자에게 머리 조아려 절하네.
15.본손과 지손이 대대로 이어 백세토록 전하니,
강토라면 왕실에서 한 치의 땅16)이라도 먼저 얻었구나.
16.벼와 삼을 아울러 심고 상대부에게 연회 베풀기를 명하였는데,
장남과 장녀 낳았으니 진괘(震卦)와 손괘(巽卦)를 얻어 점쳤네.
17.밝고 밝은 임금이 위에 있고 혁혁한 공 세운 신하가 아래에 있으니,
성대히 어진 임금의 뜻을 받들어 근심함이 없구나.
18.그 동안 임금의 덕망이 또한 어긋나지 않았으니,
백대에 걸쳐 우리 왕실에는 자손이 가득 번성하리라.
15) 임금의 당에 ∼ 빌면서 : 『시경』 「칠월」에 나오는 다음의 말을 따다가 인용한 것이다. “저 공당에 올라가서 저 뿔 술잔을 드니, 만수무강하시리라.”〔『詩經』 「豳風·七月」, “躋彼公堂, 稱彼兕觥, 萬壽無疆.”〕
16) 한 치의 땅 : 전국시대 범수(范睢)가 진 소왕(秦昭王)에게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을 바치면서 다음과 같이 한 말에서 따온 것으로 이해된다. “왕께서는 먼 나라와 우호를 맺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렇게 하면 한 치의 땅을 얻어도 왕의 땅이 될 것이고 한 자의 땅을 얻어도 왕의 땅이 될 것입니다.〔『史記』 권79, 「范雎列傳」, ”王不如遠交而近攻, 得寸, 則王之寸也, 得尺, 亦王之尺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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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봄빛이 화창한 시절’1)을 읊은 부
01.주(周)나라의 정사를 살펴보면 네 가지 일2)을 먼저 하였는데,
희황(羲皇; 伏犧氏)의 고명한 덕을 본받아서 만물의 생장을 도와주었네.
02.길조를 얻어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니,3)
태양의 따듯한 기운을 원월(元月; 정월)에 얻었구나.
03.따뜻한 춘삼월에 조령(詔令)을 내렸으니,
시절이 알맞아서 화기가 넘치네.
04.뭇 서민들을 위해 진대(賑貸)를 하려 하여
음양이 교감하는 절서를 살펴보았네.
05.나 황제가 막 한(漢)나라의 제업을 이어받았으니,
백성들과 더불어 이 봄을 함께하리라.
06.고조(高祖)의 국시를 계승하여 제위에 올랐는데,
두 번 지위를 사양하고4) 인정을 베풀었네.
07.나라의 운수에 복록이 무궁하니,
바람에 풀이 눕듯이5) 덕화가 온 나라에 스며들었네.
08.깊은 궁궐에서 조서를 내렸으니,
백성들을 돌아보고 진무(賑撫)하려 함이었지.
09.곤궁한 백성들이 곧 죽음의 나락에 떨어질 듯 위험했으나,
잘 다스린다면 태평한 세상을 만들 수 있지.
10.산동(山東)의 수령이 황제의 명령을 선포하였음에,
지금 이 시절에 무슨 까닭인가 하고 의아하게 여겼지.6)
11.하늘이 네 계절을 균등하게 나누었는데,
가장 좋은 계절은 바로 따뜻하고 온화한 봄이라네.
12.해 돋는 곳 양곡(暘谷)에서 돋는 해를 맞이하였으니,
율관(律管)은 태주(太蔟; 정월)의 때가 되었음을 알렸네.7)
13.봄의 신 태호(太昊; 太皞)8)가 채찍질을 멈추어 속도를 늦추었으니,
중화(中和)의 도리를 따르면 행여 화난을 면할 수 있다 했네.9)
14.아래의 백성들을 살피는 계책이 극진하니,
어찌 유독 온화함이 없었겠는가.
15.백성들의 평명(平明)함은 제왕의 은덕에 감화되었음이니,
기자(箕子)의 오복(五福)10)을 받아서 보전하시기를 기원하였네.
16.춘신(春神)이 엄연히 새해 첫날에 임하셨으니,
이 달을 맞이하여 만물에게 혜택을 입혀주시네.
17.인년(寅年)의 정월을 맞이하여
새해의 첫날에 바라보니 하늘이 아득하구나.
18.원기가 유행하니 정사(政事)의 신속한 효과요,11)
지극한 묘리를 운용하니 교화의 요체이네.
19.바야흐로 뭇 생명체가 스스로 즐거워하니,
그 시절은 곧 중성(中星)이 조성(鳥星)인 때12)이네.
20.24번의 화신풍(花信風)13)이 차례로 부니,
36궁이 모두 봄이 되었구나.14)
21.춘정월에는 청양(靑陽)의 좌개(左介)에서 지내니,15)
춘대(春臺)16)의 화락한 기상을 얻었다네.
22.조수(鳥獸)도 길들여졌으니 순(舜)임금의 시대였고,17)
덕화가 초목을 아름답게 빛내었으니18) 탕(湯)임금이었지.
23.가지 두 줄기가 뻗자 정원에 온갖 생물들이 번창하니,
손을 흔들고 발을 구르며 춤을 추도록 하는구나.
24.지붕을 두터이 함에 추운 날씨에도 따뜻했는데,
지금 온 산하에 태평한 양기가 되돌아왔네.
1) 바야흐로 봄빛이 화창한 시절 : 한나라 문제(文帝) 원년인 기원전 179년 3월, 문제가 춘궁기를 맞아 곤궁한 백성들을 구제하는 문제에 대해 대책을 구하면서 내린 조서(詔書)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 조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바야흐로 봄빛이 화창한 시절에 초목과 뭇 생물들이 모두 스스로 즐거워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백성들 가운데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과 곤궁한 사람들이 혹 죽음의 나락에 떨어지려고 하건만, 아무도 이를 보살펴 주지 않고 있다. 백성의 부모인 임금은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이들을 구제할 대책을 논의하라.[方春和時, 草木群生之物皆有以自樂, 而吾百姓鰥寡孤獨窮困之人或阽於死亡, 而莫之省憂, 爲民父母將何如, 其議所以振貸之.]”〔『前漢書』 권4, 「文帝紀」〕
2) 네 가지 일 : 제사(祭祀)·조근(朝覲)·회동(會同)·빈객(賓客)에 대한 네 가지 일을 이른다.〔『周禮』 「天官·小宰」, “以法掌祭祀·朝覲·會同·賓客之戒具, 軍旅·田役·喪荒亦如之. 七事者, 令百官府, 共其財用·治其施舎·聽其治訟. <주> 七事, 謂先四, 如之者三也.”〕
3) 길조를 얻어서 ∼ 올랐으니 : 한고조의 넷째 아들 문제(文帝) 유항(劉恒)이 대왕(代王)으로 있을 때 거북점을 쳐서 ‘대횡경경 여위천왕(大橫庚庚 余爲天王)’ 곧 ‘가로 줄 무늬가 크고 깊으니, 내가 황제가 되리라’라는 뜻의 길조를 얻었는데, 그 뒤 과연 제위에 올랐다는 고사를 인용한 말이다.〔『前漢書』 권4, 「文帝紀」, “代王報太后, 計猶豫未定, 卜之兆, 得大横, 占曰, 大横庚庚, 余爲天王, 夏啓以光.”〕
4) 두 번 지위를 사양하고 : 문제가 대왕(代王)으로 있을 때 군신들로부터 천자의 자리에 오르기를 요구받자 서향하여 세 번 사양하고 남향하여 두 번 사양하였다 한다.〔『前漢書』 권4, 「文帝紀」, “羣臣皆伏固請, 代王西鄉讓者三, 南鄉讓者再.”〕
5) 바람에 풀이 눕듯이 : 원문 ‘風草(풍초)’를 옮긴 말이다. 『논어』에서 군자의 덕을 바람에 비유하고 소인의 덕을 풀에 비유하여 ‘풀에 바람을 가하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다.’라는 말을 인용한 표현이다.〔『論語』 「顔淵」, “君子之徳風, 小人之徳草, 草上之風, 必偃.”〕
6) 산동의 ∼ 여겼지 : 한나라 문제(文帝) 때의 인물인 가산(賈山)의 「지언(至言)」에 나오는 말을 차용한 것이다. 그 「지언」에서 이르기를, “신이 듣건대, (당초 폐하께서 즉위 초에 내리신) 조서를 산동의 수령이 그 고을에 반포하자 늙은 사람과 병든 사람들까지도 모두 다 지팡이를 짚고 가서 듣고는, 죽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아서 좋은 세상이 이루어지는 광경을 보고 싶어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前漢書 권51, 賈山傳」, “臣聞山東吏布詔令, 民雖老羸癃疾, 扶杖而往聽之, 願少須臾毋死, 思見徳化之成也.”〕 대개 산동의 수령이 반포한 황제의 조서란 위 각주 1)의 조서를 이른다.〔夏良勝, 中庸衍義 권9, “漢文帝議賑貸詔曰, …… <注> 吏所布者, 殆斯詔也耶.”〕
7) 율관(律管)은 ∼ 알렸네 : 고대에 갈대의 재[葭灰]를 율관(律管)에 넣어 절후를 측정하였다. 12개의 율관에 갈대 재를 각각 채워 놓고 절기를 기다리면서 살펴보면, 매 절기 때마다 해당 율관의 재가 날린다[飛灰·吹灰]고 한다. 예컨대 11월 동지에는 황종 율관의 재가, 12월에는 대려(大呂) 율관의 재가, 1월에는 태주(太蔟) 율관의 재가 각각 날아 움직인다는 식이다.〔『後漢書』 「律曆志上」〕
8) 봄의 신 태호(太昊; 太皞) : 『예기』 「월령」에 보이는 말이다.〔『禮記』 「月令」, “(孟春之月) 其帝太皞, 其神句芒.”〕
9) 중화(中和)의 ∼ 있다 하네 : 『전한서』에 보이는 구절 “중화의 도리를 따르면 행여 화난을 면할 수 있다고 하지만, 안연(顔淵)은 일찍 죽었고 염경(冉耕)은 악질에 걸렸었지.”에서 따온 말이다.〔『前漢書』 권100上, 「班固叙傳」, “欥中龢爲庶㡬兮, 顔與冉又不得.”〕
10) 기자(箕子)의 오복(五福) : 기자(箕子)가 지었다는 『서경』의 홍범구주(洪範九疇) 가운데 아홉 번째로 나오는 다섯 가지의 복, 즉 수(壽)·부(富)·강녕(康寧)·유호덕(攸好德)·고종명(考終命)을 이른다.
11) 정사(政事)의 신속한 효과요 : 『중용』의 구절 “사람의 생리는 정치에 민감하게 나타나고, 땅의 생리는 나무에 민감하게 나타난다. 대저 정치라는 것은 포로(蒲盧; 갈대)와 같이 빨리 이루어지는 것이다.”에서 따온 말이다.〔『中庸章句』 제20장, “人道敏政, 地道敏樹, 夫政也者蒲盧也.”
12) 중성(中星)이 조성(鳥星)인 때 : 초저녁에 남중(南中)하는 별 곧 ‘중성(中星)’이 남방의 주작칠수(朱雀七宿) 곧 ‘조성(鳥星)’인 시점이라는 말로, 춘분날을 이른다.〔『書經』 「堯典」, “日中, 星鳥, 以殷仲春.”〕 ‘星鳥(성조)’는 ‘중성(中星)은 조성(鳥星)이다.’라는 말이다.
13) 화신풍(花信風) : 늦겨울 및 봄철에 매5일마다 한 종류의 꽃바람이 불어서 모두 24차례 분다고 하는 꽃바람을 이른다. 음력 12월의 소한(小寒)에서 3월의 곡우(穀雨)에 이르기까지 4개월 간 8개의 절기(節氣)에 해당하는 120일을 5일 단위로 나누면 모두 24차례가 된다.
14) 36궁이 모두 봄이 되었구나 : 남송의 학자 소옹(邵雍)의 시 「관물음(觀物吟)」에서 따온 말이다. 그 시에서 읊기를 “이목이 총명한 남자의 몸이니, 천지조화의 부여함이 빈약하지 않도다. 월굴(月窟)을 찾아야만 비로소 사물을 알게 되거니와, 천근(天根)을 밟지 않으면 어찌 사람을 알리요. 건괘가 손괘를 만나면 때 월굴을 보고, 지괘가 뇌괘를 만나면 때 천근을 본다. 천근과 월굴 사이를 한가로이 오가니, 삼십륙궁이 모두 봄이로다.[耳目聰明男子身, 洪鈞賦與不爲貧. 須探月窟方知物, 未躡天根豈識人. 乾遇巽時觀月窟, 地逢雷處看天根. 天根月窟閑來往, 三十六宮都是春.]” 제5구는 ‘천풍구(天風姤)’괘를, 제6구는 ‘지뢰복(地雷復)’괘를 각 뜻한다. ‘월굴’은 ‘달에 있는 굴’이라는 뜻으로 미약한 음(陰)의 시작을 뜻하고, ‘천근’은 ‘하늘의 뿌리’라는 뜻으로 미약한 양(陽)의 시작을 뜻한다. 음양의 소장(消長)은 천지와 인물의 생성원리이므로, 월굴과 천근을 알아야만 사물과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삼십륙궁’이란 『주역』 64괘 중에서, 괘의 상하를 뒤집어도 모양이 동일한 8개의 불역괘(不易卦) 건(乾)·곤(坤)·감(坎)·리(離)·이(頤)·중부(中孚)·대과(大過)·소과(小過)와, 나머지 56괘 중 진(震)·손(巽)·간(艮)·태(兌) 4괘와, 뒤집어서 둔(屯)과 몽(蒙)처럼 동일한 모양이 되는 24개의 번역괘(反易卦)를 합하여 이르는 말로, 결국 64괘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擊壤集』 권16, <觀物吟>; 『皇極經世書解』 卷首上〕
15) 춘정월에는 ∼ 지내니 : 『예기』 「월령」의 구절 “맹춘의 달에 천자는 청양의 좌개에서 거처한다.”에서 따온 말이다.〔『禮記』 「月令」, “(孟春之月) 天子居青陽左个.”〕 ‘청양’은 임금이 정사를 보고 제사를 지내는 명당(明堂)의 5실(室) 중 동쪽에 있는 것이다. ‘좌개’는 왼쪽의 곁방[偏室]이다.
16) 춘대(春臺) : 봄 경치를 조망할 수 있는 화락하고 즐거운 장소를 뜻한다. 『노자(老子)』 (제20장)의 “사람들이 즐거워하니, 마치 진수성찬을 먹는 듯도 하고 봄 누대에 오른 듯도 하다.[衆人煕煕 如享太牢 如登春臺]”라는 문구에서 유래된 말이다.
17) 조수(鳥獸)도 ∼ 시대였고 : ‘순임금 때 길들여진 조수가 많았다’는 기록이 『사기』에 보인다.〔『史記』 권5, 「秦本紀」, “大費(伯益)拜受, 佐舜調馴鳥獸, 鳥獸多馴服.”〕
18) 초목을 아름답게 빛내었으니 : 『서경』의 다음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하늘이 성실히 하민을 돕는지라, 죄인 걸(桀)이 쫓겨나서 복죄(伏罪)하였다. 천명이 어긋나지 않아 그 아름답기가 마치 초목의 꽃과 같고 만백성이 참으로 생식(生殖)된다.”〔『書經』 「湯誥」, “上天孚佑下民, 罪人黜伏, 天命弗僭, 賁若草木, 兆民允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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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위대한 한(漢)나라의 화락한 기운을 유행시키니,
어찌 그 어느 것인들 아름답지 않으리오.
26.대지에는 백성이 많아 인연(人煙)이 자욱한데,
밝은 하늘에서는 이들을 우로(雨露)로 적셔주네.
27.풀무의 작용처럼 역수(曆數)가 돌고 바뀌어,
어느 곳 할 것 없이 우리 백성들에게 다 봄이 찾아왔네.
28.신선의 세계에 신선의 약이 흘러넘치고,
신선의 수도에 옥촉(玉燭)을 들여 놓았네.19)
29.아름다운 때를 만나 은혜를 베풀었으니,
뭇 백성들을 사랑하여 큰 복을 누리게 하였구나.
30.못난 나는 몇 천 년 지난 뒤 무릎을 치면서
한 편의 부를 짓고 일어서서 깊이 탄식을 하노라.
19) 신선의 세계에 〜 들여 놓았네 : 신선 세상과 같이 풍요롭고 아름다운 환경을 표현한 말로, 당나라 문인 왕발(王勃)의 다음 글에서 인용한 것이다. “신선 세계에 신선의 약이 흘러넘치는데 비와 이슬이 꽃을 고루 적셔주고, 신선의 수도에 옥촉을 들여 놓았는데 바람과 우레가 순조롭구나.[溢金膏於紫洞, 雨露均華, 棲玉燭於元都, 風雷順軌.]”〔王勃, 『王子安集』권13, 「益州夫子廟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