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 분류정보
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4_01_A00582_001
- ㆍ입수처
- 창녕조씨 명숙공종가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증빙류-시권(試券)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887년 조석삼 시권 / 曺錫三 試券
- ㆍ발급자
-
조석삼(曺錫三)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 ㆍ형태정보
-
점수: 1크기: 64.9 × 155.6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1887년 강릉(江陵)에 거주하는 85세의 조석삼(曺錫三)의 진사시(進士試) 초시(初試) 시권(詩卷)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율곡연구원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강릉(江陵)에 거주하는 85세의 조석삼(曺錫三)이 1887년(고종 24) 진사시(進士試) 초시(初試)에서 시(詩)를 지어서 써 낸 시권(詩卷)이다. 이 시권(試券)의 작성자는 강릉에 거주하는 85세의 조석삼(曺錫三; 1803∼?)이고, 작성 시기는 1887년(고종 24, 정해년)이며, 응시한 과거시험은 진사시 초시이다. 조석삼은 그 당시 유학(幼學)의 신분이었다. 이 ‘유학’이라는 말은 ‘무위 무관(無位無官)의 선비’를 뜻하며, 나이의 많고 적음과는 상관이 없다. 후술하는 조석삼의 진사시 복시 시권과 관련 『사마방목(司馬榜目)』(『사마방목(司馬榜目)』 : 이의 정식 명칭은 『숭정기원후5무자 식년 사마방목(崇禎紀元後五戊子式年司馬榜目)』이다.) 등을 참조해보면, 조석삼은 그 이듬해인 1888년(고종 25, 무자년)에 86세의 나이로 식년 진사시에 합격함으로써 유학의 신분을 벗어났다. 『사마방목』〔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에 의하면 조석삼의 생년이 ‘갑자년’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이 생년은 조석삼의 진사시 복시 부(賦) 시권의 비봉(秘封)에 기재된 응시 당시의 나이 86세에 비추어볼 때 ‘갑자년’은 그 전해인 ‘정해년’이어야 옳다. 따라서 이 『사마방목』의 기재 ‘갑자년’은 방목 작성 당시 한 해 차이의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1888년(고종 25, 무자년) 86세’를 기준으로 조석삼의 출생 연도를 역산하면 그것은 곧 1803년(순조 3, 정해년)이다. 더구나 위 『사마방목』에서는 조석삼의 출생연도 ‘갑자년’을 1864년(고종 1)으로 한 갑자 늦추어 파악한 나머지 조석삼의 진사시 합격 연령을 ‘25세’라고 함으로써 거듭 오류를 범하였다. 이는 모두 조석삼의 해당 시권을 검토해보지 못한 결과라 할 것이다. 과거시험은 진사시이고 그 단계는 초시이다. 진사시라는 근거는 고시과목이 시라는 점이다. 참고로 말하면 시는 문과에서는 고시(考試)하지 않고 진사시에서만 고시한다. 그 단계가 초시라 함은 조석삼이 이 시험에 응시하였을 때의 연령이 85세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 이듬해인 86세 때 식년 진사시 복시에 합격하였다. 식년시의 경우 식년 전 해의 가을에 초시를 치르고 당해 식년(‘식년(式年)’이란 태세(太歲)가 자(子)·묘(卯)·오(午)·유(酉)에 있는 해인데, 3년마다 드는 이러한 해에 나라에서는 정기적으로 호적을 조사·정리하고 과거(科擧)를 설행하는 것으로 법식으로 정하였다.)의 봄에 복시를 치르므로, 조석삼은 무자년의 식년 진사시에 합격하기 전인 85세 당시 정해년 가을에 이 시험을 초시의 단계로 치렀다고 할 수 있다.
시의 제목은 ‘원호상자 자손창성 원호하자 세숙민자(願乎上者, 子孫昌盛, 願乎下者, 歲熟民滋.)’인데, 이는 “위로 원하는 것은 자손의 창성이요 아래로 원하는 것은 농사의 풍년과 백성들의 불어남이다.”라는 뜻이다. 이 시험의 제목[試題]이자 시의 제목[詩題]인 이 말의 출처는 남송 때의 학자 동래(東萊) 여조겸(呂祖謙; 1137-1181)의 『여씨가숙 독시기(呂氏家塾讀詩記)』이다. 거기에서 여조겸은 “『시경』 「소아(小雅)」의 「사간(斯干)」편과 「무양(無羊)」편의 마지막 장(章)을 가지고 살펴보자면, 위로 원하는 것은 자손의 창성이요 아래로 원하는 것은 농사의 풍년과 백성들의 불어남이니, 그 밖에는 모두 원하는 것이 아니다. 저 진(秦)나라·한(漢)나라의 큰일 벌이기를 좋아한 임금들은 이러한 일들로써 소원을 삼으려 하였겠는가.”(『시경』 「소아(小雅)」의 …… 하였겠는가 : 〔『呂氏家塾讀詩記』 권12, 「祈父之什」, “東萊曰, 以斯干無羊之卒章觀之, 所願乎上者, 子孫昌盛, 所願乎下者, 歳熟民滋, 皆不願乎其外也. 彼秦漢好大喜功之主, 肯以是爲可願哉.”〕)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이 과시를 제대로 잘 짓기 위해서는 『시경』 「소아」의 「사간」편과 「무양」편의 내용은 물론, 위 여조겸의 말까지도 훤히 알고 있어야 함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고시과목은 시(詩)이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에서 고시하는 시를 보통 과시(科詩)라 이른다. 이는 제술시험[글짓기 시험] 과목의 한 가지로 그 나름의 정형성을 지닌 칠언 장편의 고체시[古詩]이며, 조선후기에 이르러 대략 18련의 길이로 고정되었다. 시는 진사시의 초시·복시와 진사시의 초시에 가름하는 각종 시험에서 고시하였다. 대개 경사(經史)의 구절, 옛사람의 시구, 고사성어 등에서 따온 말로써 시의 제목으로 삼았다. 제목 중의 한 글자에 낙점(落點)하여 운자(韻字)로 삼고, 한 가지 운만 사용하였다.[환운(換韻) 불가] 시제 중에서 낙점한 운자를 한 번 사용하되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대개 제4련의 끝에 그 글자를 놓았다.
본 시권의 과시 작품은 운자가 ‘願(원)’이다. 이 ‘願(원)’은 거성(去聲)의 글자로, 거성 제14번의 운목(韻目) 글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과시에서는 매 련(聯)의 끝 글자, 곧 매 짝수 구의 끝 글자에 ‘원(願)’과 동일한 운부(韻部)에 속하는 글자로써 운을 달았으되, 운자로 제시된 ‘원(願)’자는 그 당시의 관행대로 제4련의 끝에 놓았다. 작품 전체의 길이는 18련이다. 작품의 내용은 대개 시제에 제시된 여조겸의 말을 부연하여 서술하면서 조선의 국왕 및 왕실의 덕을 칭송·찬양하고 수복과 번창을 축원한 것으로, 『시경』 「소아」의 「사간」편과 「무양」편은 물론, 『시경』 소재의 여러 시, 그 밖에 『서경』, 『예기』, 『주역』, 『춘추좌씨전』, 『사기(史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등의 다양한 문헌을 인용하여 전거로 사용함으로써 작자 자신의 주장에 정당성과 설득력을 강화하였다.
이 과시를 채점한 결과인 성적 곧 과차(科次)는 ‘차하(次下)’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次下’라는 과차 표기 옆에 다시 조그맣게 ‘외(外)’라는 글자를 부기하여 세부 분류를 해놓았다. 이 ‘차하’는 15개의 과차 등급 즉 ‘상상·상중·상하, 중상·중중·중하, 하상·하중·하하, 차상·차중·차하·갱(更)·외(外)·위(違)’ 중 열두 번째의 등급에 해당한다. 과차는 원래 ‘하하’ 이상을 합격권으로 치고, ‘차상’ 이하를 불합격으로 처리함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합격 인원수를 다 채우지 못할 경우에는 차상 이하의 과차에서도 선발하였으므로, 조석삼은 차하의 성적으로 합격권에 들게 되었던 것이다. 등제(等第) 곧 합격 석차는 표기되어 있지 않으므로, 미상이다. 시권 우측 상단의 신원(身元) 기재란 부분을 비봉(秘封)이라 이르는데, 이 시권에는 비봉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이에 조석삼 본인의 신분·성명·나이·본관·거주지와 사조(四祖; 부·조·증조·외조)의 관함·성명 등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이 비봉의 기재에 의하면, 조석삼은 유학(幼學)의 신분으로, 나이가 85세이고, 본관이 창녕(昌寧)이며, 거주지가 강릉이다. 그의 아버지는 조환진(曺桓振), 할아버지는 조윤목(曺允睦), 증조할아버지는 조명숙(曺命肅), 외할아버지는 강릉최씨 최인국(崔仁國)인데, 이들의 신분은 모두 학생(學生)이다. 이 ‘학생’도 ‘유학’과 같은 말로, ‘벼슬을 하지 못한 유생(儒生)’을 이른다. 비봉은 일반적으로 채점 시 잘라내어 따라 보관하였다가[할거(割去)] 채점이 끝난 뒤 도로 붙여봄으로써 채점의 공정을 기하였는데, 이 시권의 경우 그리하지 않았다. 본 시권에는 시권의 제출 순번이자 관리 번호인 자호(字號)가 매겨져 있지 않다. 본 시권은 애당초 자호도 매기지 않았고 그로 인해 채점 시 비봉을 할거도 하지 않았는데, 이로써 미루어볼 때 당시 시관들의 시권 관리가 다소 느슨하였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시권과 함께 조석삼이 86세 때 치른 1888년(고종 25, 무자년)의 진사시 복시 시권도 같이 보존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 두 시권을 아울러 살펴봄으로써 조석삼의 진사시 초시·복시의 응시 및 합격 상황을 좀 더 구체적이면서도 명확하게 살펴볼 수 있다.
원문 / 국역
‘願乎上者 子孫昌盛 願乎下者 歲熟民滋’詩
01.蜡墉祈歲燕謨男,
報本祝答先王憲.
02.似續妣祖斯男百,
亦有黍稻乃倉萬.
03.如墉櫛比室家溱,
聖子神孫惇信勸.
04.維周聖世衆子孫,
歲熟民滋皆所願.
05.豳風敎穡稷劉化,
灃水貽謨文武遜.
06.釐之士女獲屢豐,
本固邦家民不遠.
07.無羊之末秩斯干,
祝頌洋洋恭以愿.
08.豊年衆魚大人占,
男子維熊祥夢獻.
09.臣隣嘏祝上下泰,
壽福人君體天健.
10.春郊弗子帶弓䪅,
夏宗祈年嘗黍飯.
11.王家大願不外是,
一世民生歸化圈.
12.多男華岳午會泰,
力穡殷家子惠困.
13.升平天地德堯肖,
耕鑿歌謠勞不怨.
14.公堂祈禱兕觥稱,
天子揚休虎首頓.
15.承承本支百世傳,
率土皇家先得寸.
16.禾麻並藝命亞旅,
男女相生占震巽.
17.明明在上赫赫下,
茂膺仁君志無悶.
18.由來聖德却不回,
百代宗祊延瓞蔓.
‘위로 원하는 것은 자손의 창성이요, 아래로 원하는 것은 농사의 풍년과 백성들의 불어남’1)이라는 시
01.성에서 여러 신에게 제사지내 풍년 빌고 아들에게 좋은 계책 주니2),
근본에 보답한다는 축관의 대답은 선왕의 전범(典範)이지.
02.윗대 조상을 이어서 사내아이 일백 명인데,
또한 기장과 벼가 있어서 창고가 일만 개이네.
03.성곽 같은 곡식 낟가리가 즐비하고 식구들이 무수히 많은데,3)
훌륭한 자손들에게 돈후하고 신실하기를 권면했다네.
04.주(周)나라 대대의 성왕(聖王)들은 자손을 많이 두었는데,
풍년이 드는 것과 백성들이 많이 느는 것을 모두 소원하였네.
05.빈풍(豳風)에서 농사 가르침은 후직(后稷)과 공류(公劉)의 교화요,4)
풍수(灃水)에서 좋은 교훈 자손에게 줌5)은 문왕 무왕의 겸손이네.
06.그에게 훌륭한 여사(女士)를 주고6) 거듭된 풍년을 거두니,
근본이 튼튼하여7) 나라·가정·백성의 평안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네.
07.「무양(無羊)」편 끝과 「사간(斯干)」편은
송축하는 뜻이 성대하였으니, 공손히 축원하였네.
08.태인(大人)의 점에 사람들이 물고기이면 풍년이 들고,8)
곰은 사내아이라 하여 상서로운 해몽을 올렸네.9)
09.신민들이 크게 축원하나니, 상하가 모두 태평하고,
하늘의 강건함을 본받아 임금님께서 수복을 누리시게 함이라.
10.봄날 교외에서는 자식을 보지 못하여 활집을 메었는데,10)
여름철의 조현(朝見)에서는 풍년을 빌고 기장밥을 맛보았네.
11.왕실의 큰 소원은 이 밖에 더 없으니,11)
한 시대의 백성들이 교화의 범위 안에 귀속하였네.
12.다남을 빈 화봉(華封)의 축사는 오회(午會)12)의 태평시대를 보였고,
농사에 힘쓴 은(殷)나라13)는 곤궁한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했지.14)
13.태평시대 천지와 같은 덕은 요(堯)임금이 닮았으니,
힘껏 일해 배불리 먹고 격양가 부르며 수고로움을 원망하지 않았네.
14.임금의 당에 올라 뿔 술잔을 들고 장수를 빌면서15)
양기(陽氣)로 만물을 길러주는 천자에게 머리 조아려 절하네.
15.본손과 지손이 대대로 이어 백세토록 전하니,
강토라면 왕실에서 한 치의 땅16)이라도 먼저 얻었구나.
16.벼와 삼을 아울러 심고 상대부에게 연회 베풀기를 명하였는데,
장남과 장녀 낳았으니 진괘(震卦)와 손괘(巽卦)를 얻어 점쳤네.
17.밝고 밝은 임금이 위에 있고 혁혁한 공 세운 신하가 아래에 있으니,
성대히 어진 임금의 뜻을 받들어 근심함이 없구나.
18.그 동안 임금의 덕망이 또한 어긋나지 않았으니,
백대에 걸쳐 우리 왕실에는 자손이 가득 번성하리라.
1) 위로 원하는 것 ∼ 불어남 : 이 과시(科詩)의 제목[試題]으로, 출처는 동래(東萊) 여조겸(呂祖謙)의 『여씨가숙 독시기(呂氏家塾讀詩記)』이다. 거기에서 여조겸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경』의 「사간(斯干)」편과 「무양(無羊)」편의 마지막 장(章)을 가지고 살펴보자면, 위로 원하는 것은 자손의 창성이요 아래로 원하는 것은 농사의 풍년과 백성들의 불어남이니, 그 밖에는 모두 원하지 않는 것이다. 저 진(秦)나라·한(漢)나라의 큰일 벌이기를 좋아한 임금들은 이러한 일들로써 소원을 삼으려 하였겠는가.”〔『呂氏家塾讀詩記』 권12, 「祈父之什」, “東萊曰, 以斯干無羊之卒章觀之, 所願乎上者, 子孫昌盛, 所願乎下者, 歳熟民滋, 皆不願乎其外也. 彼秦漢好大喜功之主, 肯以是爲可願哉.”〕
2) 좋은 계책 주니 : 원문 ‘燕謨(연모)’를 옮긴 말이다. 연익지모(燕翼之謨)의 준말로, ‘자손을 위한 좋은 계책’을 뜻한다. 『시경』 「대아(大雅)·문왕유성(文王有聲)」의 구절 “그 자손들에게 좋은 계책을 물려주고, 그 아들에게 편안함과 도움을 준다.[詒厥孫謀, 以燕翼子.]”에서 유래한 말이다.
3) 성곽 같은 ∼ 무수히 많은데 : 『시경』 「주송(周頌)·양사(良耜)」에 에서 인용한 말이다. 거기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예리한 보습을 들고 나가 비로소 남녘 밭을 갈고, 백곡의 씨를 파종하니 열매가 이에 싹터 나오네. …… 쓱쓱 곡식을 베어서 빽빽하게 쌓아 올리네. 높이가 성벽 같으며 촘촘하기가 빗살과 같으니, 큰 가문을 이루었네.〔畟畟良耜, 俶載南畝. 播厥百穀, 實函斯活. …… 穫之挃挃, 積之栗栗. 其崇如墉, 其比如櫛, 以開百室.〕”
4) 빈풍(豳風)에서 ∼ 교화요 : ‘빈풍’은 특히 『시경』 「빈풍(豳風)·칠월(七月)」을 이르는 말이다. 이 「칠월」은 주공(周公)이 지은 시로, 대개 ‘농사를 준비하고, 누에를 치고, 길쌈을 하고, 수확하고, 지붕을 이는 등의 일들을 월별로 읊은 것’인데, 성왕(成王)이 농사짓는 어려움을 알지 못하므로 주공이 주나라의 선조인 후직(后稷)과 공류(公劉)의 교화를 서술하여 소경인 악사(樂師)로 하여금 조석으로 이 시를 읊어서 성왕을 가르치게 하였다.
5) 풍수(灃水)에서 ∼ 자손에게 줌 : ‘좋은 교훈 자손에게 줌’은 원문 ‘貽謨(이모)’를 옮긴 말이다. ‘이모(貽謀)’와 같은 말로 ‘조상이 자손을 위해 좋은 계책을 남겨 줌’을 뜻한다. 이는 『시경』 「대아(大雅)·문왕유성(文王有聲)」의 구절에서 유래한 말이다. 거기에서 “풍수에도 기(芑)가 자라는데, 무왕(武王)이 어찌 이곳에서 종사하지 않으리오. 그 자손들에게 좋은 계책을 물려주고, 그 아들에게 편안함과 도움을 주니, 무왕은 참으로 임금답도다.[豐水有芑, 武王豈不仕. 詒厥孫謀, 以燕翼子, 武王烝哉.]”라고 읊었다. 원문의 ‘灃’은 ‘豐’과 통해서 쓴다.
6) 그에게 훌륭한 여사(女士)를 주고 : 『시경』 「대아(大雅)·기취(旣醉)」의 구절 “그 붙여줌은 무엇인가, 너에게 훌륭한 여사(女士)를 줌이라. 너에게 훌륭한 여사를 주고, 훌륭한 자손으로써 따르게 하리라.[其僕維何, 釐爾女士. 釐爾女士, 從以孫子.]”에서 인용한 말이다.
7) 근본이 튼튼하여 : 『서경』의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하면 나라가 평안하다.”라는 구절에서 따다 쓴 말이다.〔『書經』 「五子之歌」, “民惟邦本, 本固邦寧.”〕
8) 태인(大人)의 ∼ 풍년이 들고 : 『시경』 「소아(小雅)·무양(無羊)」의 구절 중 “태인이 점을 쳐보니, 사람들이 물고기가 됨은 실로 풍년이 들 조짐이다.[大人占之, 衆維魚矣, 實維豐年.]”라고 한 말을 인용한 표현이다. ‘태인(大人)’은 ‘꿈을 풀이하는 점몽관(占夢官)’을 이른다.
9) 곰은 사내아이라 ∼ 올렸네 : 『시경』 「소아(小雅)·사간(斯干)」」의 구절 중 “태인이 점을 쳐보니, 작은 곰과 큰 곰은 사내아이를 낳을 상서이다.[大人占之, 維熊維羆, 男子之祥.]”라고 한 말을 인용한 표현이다.
10) 봄날 교외에서는 ∼ 메었는데 : 『예기』 「월령」에 나오는 다음의 말을 따다가 인용한 것이다. “중춘의 달에 제비가 이른다. 이르는 날에 태뢰의 예물로 고매(高禖)에게 제사한다. 천자가 친히 제사지내러 가면 왕비가 9빈(嬪)과 모시는 여인들을 거느리고 가는데, 이때 천자를 모시고 잔 임신한 여인을 예우하여 고매의 앞에서 (생남을 기원하며) 활과 활집을 차게 하고 활과 화살을 준다.[是月也, 玄鳥至. 至之日, 以太牢祠于高禖. 天子親往, 后妃帥九嬪御, 乃禮天子所御, 帶以弓韣, 授以弓矢, 于高禖之前.]” ‘고매(高禖)’는 ‘매신(媒神)’인데, ‘교매(郊禖)’라고도 이른다. 동일한 취지의 말이 『시경』 「대아(大雅)·생민(生民)」의 주석에도 보인다.〔『詩經』 「大雅·生民」, “生民如何, 克禋克祀, 以弗無子. <注> 精意以享, 謂之禋, 祀, 祀郊禖也. 弗之言, 祓也. 祓無子, 求有子也. 古者, 立郊禖, 蓋祭天於郊而以先媒配也. 變媒言禖者, 神之也. 其禮以玄鳥至之日, 用大牢祀之, 天子親往, 后率九嬪御, 乃禮天子所御, 帶以弓韣, 授以弓矢, 于郊禖之前也.”〕
11) 왕실의 큰 소원 ∼ 없으니 : 동래 여조겸의 『여씨가숙 독시기』에서 인용한 말이다. 앞의 각주 1) 참조.
12) 오회(午會) : 대개 문물이 융성한 요순(堯舜)의 시대를 이른다. 북송 때 소옹(邵雍)의 원회운세(元會運世)의 설에 의하면, 역사의 연대를 계산하는 단위로 1세(世)를 30년, 12세 360년을 1운(運), 30운 10,800년을 1회(會), 12회 129,600년을 1원(元)이라 하였는데, 이 1원은 우주의 시간 속에서 지극히 짧은 한 단계에 해당한다. 또 1원 12회를 12지지(地支)와 연계시켜 자회(子會)에서 시작하여 중간인 오회를 거쳐 마지막인 해회(亥會)에 이른다고 하였으니, 자회에서 사회까지 그리고 오회에서 해회까지가 각 64,800년이다. 요(堯)임금이 즉위한 B.C. 2357년 갑진년이 사회(巳會)의 끝 무렵이고 그로부터 140년 뒤인 우(禹)임금 8년 갑자년부터 오회(午會)가 시작되었다 하였으니, 그 오회가 시작된 갑자년은 1원의 절반이 갓 지난 64,801년에 해당하는 해이다.
13) 농사에 힘쓴 은(殷)나라 : 『서경』 「반경」에 나오는 다음의 말을 따다가 인용한 것이다. “농부가 밭에서 일하여 농사에 힘써야 가을에 수확함이 있는 것과 같다.”〔『書經』 「盤庚上」, “若農服田力穡, 乃亦有秋.”〕
14) 곤궁한 백성들을 ∼ 사랑했지 : 『서경』 「태갑」에 나오는 다음의 말을 따다가 인용한 것이다. “선왕께서 곤궁한 사람들을 자식처럼 사랑하였으니, 백성들 치고 그 명에 복종하여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書經』 「太甲中」, “先王子惠困窮, 民服厥命. 罔有不悅.”〕
15) 임금의 당에 ∼ 빌면서 : 『시경』 「칠월」에 나오는 다음의 말을 따다가 인용한 것이다. “저 공당에 올라가서 저 뿔 술잔을 드니, 만수무강하시리라.”〔『詩經』 「豳風·七月」, “躋彼公堂, 稱彼兕觥, 萬壽無疆.”〕
16) 한 치의 땅 : 전국시대 범수(范睢)가 진 소왕(秦昭王)에게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을 바치면서 다음과 같이 한 말에서 따온 것으로 이해된다. “왕께서는 먼 나라와 우호를 맺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렇게 하면 한 치의 땅을 얻어도 왕의 땅이 될 것이고 한 자의 땅을 얻어도 왕의 땅이 될 것입니다.〔『史記』 권79, 「范雎列傳」, ”王不如遠交而近攻, 得寸, 則王之寸也, 得尺, 亦王之尺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