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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4년 김병희외 22명 상서(儒生 金秉熹외 22명 上書)
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4_01_A00514_001
- ㆍ입수처
- 창녕조씨 명숙공종가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소차계장류-상서(上書)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854년 김병희외 22명 상서 / 儒生 金秉熹외 22명 上書
- ㆍ발급자
-
유생 김병희외 22명(儒生 金秉熹외 22명, 개인)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강릉부사(江陵府使, 기관/단체)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1854년 11월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甲寅十一月
- ㆍ형태정보
-
점수: 1크기: 101 × 59.7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 양호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율곡연구원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 ㆍ수장고
- 이름: 서가위치: 단위치:
해제
1854년(철종5) 11월 유생(儒生) 김병희(金秉憙) 등 22인이 강릉도호부사에게 올린 상서로, 고(故) 사인(士人) 권억영(權億榮)의 처 여흥민씨(驪興閔氏)의 절행(節行)을 감영에 보고하여 향후 정려(旌閭)를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지이다. 여흥민씨의 절행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는데 대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흥민씨는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겼고 바느질과 길쌈 품을 팔아 집안 살림을 일궜으며, 임진년(1832 순조32) 흉년에 시어머니의 목숨이 위급했을 때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마시게 함으로써 목숨을 연명케 하였고, 장례 및 삭망(朔望) 궤전(饋奠)에 장신구를 팔거나 이웃에 빌려서라도 빠뜨리는 법 없이 지극정성을 다했다고 한다. 또 을미년(1835 헌종1)에 남편이 양양(襄陽)에서 객사하자 식음을 전폐하다가 연로한 시아버지의 봉양 때문에 차마 따라 죽지 못하고 뒤로 미루다가 대상(大祥)과 담제(禫祭)가 끝나자 독을 마시고 남편을 따라 자결하였다. 이처럼 효와 열을 갖춘 여흥민씨의 절행을 식년(式年) 세초(歲抄)에 포함시켜 감영에 보고함으로써 정려를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강릉도호부사는 확답을 하지 않고 ‘효열의 실제 행적을 들으니 매우 감탄스럽지만 조정에까지 보고되는 일은 쉽지 않아 매번 알려지지 않고 사라지는 경우가 많으니 안타까운 일이다.’라는 제사를 내려주었다. 조선후기 효자나 열녀는 각 도의 관찰사가 각 읍의 수령으로부터 후보자 명단을 받아 예조에 보고하면 예조에서 삼당상이 심의하여 의정부로 이송하고 의정부에서 논의를 거쳐 국왕에게 보고하는 과정을 거쳤는데, 『경국대전』에서 1년에 한 번씩 이루어지던 것이 『대전통편』에서는 3년마다 한 번씩 행해지는 것으로 바뀌었다. 식년은 간지에 자(子), 오(午), 묘(卯), 유(酉)가 들어가는 해를 가리키는데, 이 상서를 올린 갑인년 다음 해가 을묘년으로 식년이 되고, 식년 초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갑인년 11월에 이 상서를 올린 것이다.
원문
儒生金秉憙等謹再拜上書于城主閤下 伏以 生等曾以故士人權億榮妻驪興閔氏節行 齊籲營邑 不止一再 而辭不足以達意 事或眩於虛實 尙未蒙旌異之典 何以勸後世之孝與烈哉 古人有言 知人之善而不以告人者 是不明也 告而不以實者 是不信也 生等每誦至此 未嘗不三復興歎 而窃自愧焉 玆又不避煩瀆 幸乞垂察焉 治下丁洞面有以孝子門爲里號者 卽故孝子監察權德裕及其母節婦崔氏旌閭之地也 權億榮是監察之七代孫 而其妻閔氏 自始嫁事舅姑 極其誠孝 家雖甚貧 賣針傭織 左右奉養 親極滋味 常慕監察公兩世節行 每過其門閭 必爲之改容而致敬焉 盖其素性然也 間値壬辰歉荒 渾家遘癘 其夫億榮 先以父命 出他在外 閔氏獨幹家務 及其姑疾革之時 所用常藥 必先嘗而後進 至不可醫 則咋指出血以試者再而得延晷刻之命 使盡其身後事而無憾焉 殯葬諸節及朔望饋奠 至賣釵釧 或乞諸其隣族 未嘗或闕焉 而祥畢歲乙未 其夫客歿于襄陽 閔氏自訃至日 水漿不入口矣 其必死而以舅老無養 未忍便訣 嘗謂其所親曰 吾之未亡 將有待也 盖指祥禫旣畢後言也 果於禫畢之夜 卽入寢所飮毒藥 出而告訣其舅曰 夫死而三年 已畢無嗣姓之兒 不孝之罪無以自贖 莫如從夫於地下 以不負所天 以新衣一襲 獻諸其舅 言訖而就盡 雖欲救之 而藥已爲祟 無可及焉 嗚呼烈哉是婦也 盖其所秉之儀節 已決於夫死之日 豈不知卽日自裁之爲烈哉 然而其心以爲夫旣無子而歿身 又與之偕亡 則三年之制 無所施矣 隱忍苟活 以俟其喪畢 生而盡斂葬薦獻之節 死而遂同穴之願 以明當日不共死之義 古所謂慷慨殺身者易 雍容就義者難 其非閔氏之謂乎 自壬癸以來 遠近傳誦 或稱權孝婦 或稱閔烈婦 談其時告訣之辭 尙有嗚咽而流涕者 生等居同鄕隣 宜其知之詳且切焉 而况遠近婦孺疎賤之一辭雷同者乎 今當式年 郡邑例有歲抄之擧 幸伏望以閔氏苦節特行 收入於其中 以爲轉報營門 期有實效之地 千萬無祈懇之至 城主閤下 甲寅十一月日 儒生金秉憙 崔羲河 金基豊 曺錫孝 金晉浩 鄭東基 朴曾若 崔衡魯 辛命漢 金學璿 金用槿 權敎民 黃德升 沈元圭 趙延年 沈學書 李東和 金聲九 趙錫英 崔弼容 柳晃 金東星 沈遠鐸 等
〈題辭〉
孝烈實行 聞極欽歎 而徹聽未易 每多泯沒 是庸憫情向事 初八日 行使[着押] [官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