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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년 이하응 간찰(坡生 簡札)
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4_01_A00413_001
- ㆍ입수처
- 창녕조씨 명숙공종가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874년 이하응 간찰 / 坡生 簡札
- ㆍ발급자
-
이하응(李昰應, 1820~1898, 조선, 개인)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신좌모(申佐模, 1799~1877, 조선, 개인)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1874년 9월 26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九月卄六日
- ㆍ형태정보
-
점수: 1크기: 22.8 × 12.5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율곡연구원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 ㆍ수장고
- 이름: 서가위치: 단위치:
해제
9월 26일에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담인澹人 신좌모申佐模(1799∼1877)에게 보낸 간찰이다. 이하응의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 시호는 헌의獻懿로 영조의 친손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의 아들이다. 1863년(철종14)부터 1873년(고종10)까지 10년간 섭정하였고, 1882년(고종19) 임오군란 직후 잠시 정권을 잡았으나 명성황후의 계책으로 청나라로 연행되어 4년간 유폐된다. 운현궁에 칩거하며 기회를 노리던 중 1894년(고종31) 동학농민운동으로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일어나자 일본에 의해 영립되어 친청파親淸派인 사대당事大黨을 축출하고 갑오개혁에 참여하였다. 1872년에 고종이 성인이 되자 부친을 대신하여 직접 정치를 주관하고자 하였는데, 1873년 동부승지인 최익현崔益鉉의 상소를 계기로 친정을 결심한 고종은 이듬해부터 구체적인 친정 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이에 대원군은 양주 직곡에 내려가 은거하였다. 강릉 조명숙가에 전해지는 간찰은 이 시기(1874∼1876)에 작성된 것들이다. 수신자 신좌모申佐模(1799∼1877)는 자가 좌인左人, 호는 담인澹人으로 1835년(헌종 1)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병조좌랑·사헌부 집의·사간원 사간 등을 지냈고, 1855년(철종 6)에는 진위진향사進慰進香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은퇴한 뒤에는 향리에 화수헌花樹軒을 짓고 종친과 후진들을 교육,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신좌모의 문집인 『담인집澹人集』 권14에는 대원군에게 보낸 간찰 3점, 답서 6점 등 9점의 간찰이 실려 있다. 일전에 기변驥弁이 올 때 편지를 보냈는데, 지금 황변黃弁이 고향을 찾는다는 말을 듣고 편지를 부치지만 어느 때나 들어가게 될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낙엽진 빈 산에 새들의 울음소리만 들리는 계절에 멀리 저녁 구름을 바라보니 마음이 아득하다고 심정을 전했다. 상대방의 안부를 생각하며 자신은 먹고 마시며 지낼 뿐 산 밖의 일은 모른다고 근황을 전하면서 마음이 편안하고 몸이 한가로운 것이 참다움을 기르는 방법이 된다고 하였다. 대감께서 편안하기를 바란다는 끝인사를 덧붙였다. 발신자를 파생坡生이라고 하였는데 자신의 호인 석파石坡를 줄여 쓴 듯하며, 권력에서 밀려나 시골에 은거하던 대원군의 생활과 심정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대원군이 보낸 편지는 모두 화려한 색채와 여러 가지 판화를 정교하게 인쇄한 시전詩箋을 사용하고 있다. 이 편지의 용지는 대나무 가지에 앉은 참새 두 마리를 주황색과 인주 색으로 정교하게 인쇄한 것으로 7행의 세로줄이 있으며 글과 낙관도 인쇄되어 있다. 일반인들이 보낸 편지에서는 볼 수 없는 용지여서 당시 왕실에서 사용한 시전의 연구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자료이다.
申佐模의 답장 澹人集 卷14 書, 「上答石坡大老書 甲戌」이다. 이 편지는 대원군의 1874년 9월 9일, 22일, 26일 편지에 대해 한꺼번에 답한 것이다. 자신이 낙향할 때 振威에 묵었는데, 振威縣令 睦養錫이 대원군께서 轎에 앉아 鶴氅衣를 입고 白羽扇을 쥐고 있는 모습이 평상시와 다름없고 마치 신선 같더라고 얘기해 주었다고 하였다. 鶴氅衣는 문인들이 燕居 때 입는 의복으로 신선의 옷 혹은 덕망 있는 학자의 옷으로 일컬어졌다. 이 차림새는 대원군에게 탈속적 면모 및 학문과 예술에 정통한 인물의 이미지를 부여하는 시각적 장치였다.(이경화, 「그림자 국왕의 초상: 와룡관학창의본 이하응초상」, 미술사와 시각문화 14,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2014) 대원군은 고종 및 반대파에 대한 정치적 시위의 일환으로 진행된 남연군 묘소 참배 때도 이러한 이미지를 활용하였다. 또 南村의 여러 어른이 直谷에 문안 갔다가 돌아와서는 대원군의 모습이 좋고 거처가 안온하다고 말했다는 소식을 서울에서 돌아온 자신의 아들이 전해 주었다고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대원군의 ‘여생의 낙’이란 구절을 보니 한편으로는 존경스럽고 한편으로는 가슴이 미어 온다고 하였다. 대원군이 머물고 있는 直谷은 자신이 지나가 본 곳인데 여러 지리적 조건이 加平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좋다고 하였다. 대원군이 直谷에서 村老들과 한가롭게 지내면서 그들의 歡心을 얻는 등 잘 지내고 있는 것에 대해 이는 삼천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찬미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은 반드시 이곳에서 오래 머물 리가 없다고 위로하였다. 李載冕이 서울과 楊州를 자주 왕래하게 된 것에 대해 申佐模도 걱정을 전하였다. 李載元이 特旨로 병조판서에 제수되고 李載冕이 장차 중임을 맡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고 하면서, 고종의 의중을 알 수 있다는 자신의 희망 섞인 관측을 전하였다. 別紙에서는 대원군의 실각에 결정적 역할을 한 崔益鉉에 대해서 그 고기를 먹고 그 가죽을 벗겨 깔고 싶다고 하면서 적개심을 표현하였다. 또한 斥和 등을 주장하는 장문 상소를 올리고자 하였으나 鎭撫使 혁파 소식과 대원군의 德山 행차 소식을 듣고서 상소의 초고를 불태우고는 즉시 낙향하였다는 저간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원문
澹人兄丈文丌 日前驥弁之來 先付茂椷 計將先此珠記矣 今聞黃弁之尋鄕 玆又付信 亦未知何日入抵 木落山空 只聞鳥漏 遙瞻暮雲 我心悠悠 恭惟文候萬鬯 鯫生飮啄而已 山外事 我須不知 心安身閒 此爲養眞之道 旣聞信禠 書報平安二字 統希台安 不備 九月卄六日 坡生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