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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4_01_A00412_001
- ㆍ입수처
- 창녕조씨 명숙공종가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874년 이하응 간찰 / 李昰應 簡札
- ㆍ발급자
-
이하응(李昰應, 1820~1898, 조선, 개인)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신좌모(申佐模, 1799~1877, 조선, 개인)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1870년 9월 9일간지연도: 甲戌왕력:추정시기:본문: 甲戌九月九日
- ㆍ형태정보
-
점수: 5크기: 22.8 × 14.8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1874년 9월 9일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신좌모(申佐模, 1799~1877)에게 보낸 양주(楊州) 직곡(直谷)에 온 자신의 안부를 전하고, 그 과정에서 지은 시를 보낸다는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율곡연구원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1874년 9월 9일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신좌모(申佐模, 1799~1877)에게 보낸 양주(楊州) 직곡(直谷)에 온 자신의 안부를 전하고, 그 과정에서 지은 시를 보낸다는 간찰이다. 대원군은 먼저 申佐模의 “蕭蕭數騎向南行”이란 시구를 통해 申佐模가 낙향한 것을 파악했다고 하였다. "1874년(고종 11) 가을에 申佐模는 歐美 열강이 조선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비분강개하여 장문의 상소를 작성하여 올리려고 하였으나 저지하는 이들이 많아서 그 초고를 태우고 나서 가족들을 데리고 낙향하였다. “甲戌秋, 歐美諸邦要挾強梁, 以其𧗱易我禮義. 公憂憤慷慨, 治䟽數千言, 將上, 尼之者多, 且念時事已去, 歎息吟詩曰: ‘敢擬晦翁占遇遯, 慙無澹老筆當師.’ 遂焚藁, 卽日挈眷歸鄕里.”(申獻求, 澹人集 卷20 附錄, 「墓碑銘」) 금년의 풍작에 대한 다행스러운 마음을 전하였다. 낙향하는 도중 申佐模가 지은 詩句에 대해 공개될 경우 비방의 소지가 있는 부분을 언급하며 수정을 당부하였다. 자신은 도성문을 나가 남쪽으로 가서 南延君 묘소를 성묘하고 나서 加平으로 향하였으나 당시 흥선대원군 집안은 加平에 거주할 곳을 두고 있었던 것 같다. “遣都承旨問安, 大院君府大夫人, 以時在加平.”(李晩燾, 響山日記 甲戌 8月 13日) 그 方位가 자손들에게 不吉하기 때문에 방향을 돌려 楊州 直谷에 머물게 되었다고 하였다. 直谷의 거처는 桂洞 故 李相公이 지은 교외의 별장으로 생활환경이 좋고 서울과 50리 길이라 서울 소식이 매일 전해오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하였다. 다만 관직을 수행하는 아들 李載冕이 京鄕을 왕래하는 것에 대해 염려하였다. 날마다 어린 손자들과 놀면서 산책하고 楓林에서 여유롭게 지내는 것을 여생의 낙이자 하늘이 내린 복이라 여긴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러한 생활은 뜻 있는 자는 깊이 탄식할 것이고 무정한 자들은 비난하면서 코웃음을 칠 것이라고도 하였다. 直谷에 살게 된 것이 마치 전생에 미리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였다. 그동안 자신이 여정에서 지은 몇 수의 시는 자신의 솔직한 이야기를 담은 것으로서 時諱에 얽매이지 않은 것이 많다고 하면서 보관하지 말고 보는 즉시 찢어 버리라 당부하였다. 여기서 언급한 시는 본 편지에 추신 형태로 기재되어 있는데, 「在始興初程轎中 偶吟卽景」, 「自德山回路偶吟」, 「轉入加平偶吟」, 「直谷偶吟」 등 모두 4수이다. 끝으로 三班을 막론하고 南人 인사들이 자신이 떠날 때 모두 와서 작별하였는데 비방이 미칠까 우려되어 한번 보고는 금방 이별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원문
(1) 聞蕭蕭數騎向南行之句 已知台駕之南啓 意欲修候 便人無因 苦待申弁之來訪 此弁姑不來面 時當重陽 忽思落帽題糕之意 玆修茂椷 以待申弁之來此順付 未知何日何時 相逢付信 內函則以重陽塡之 外封之日字 眞是付禠之日也 今年三農占登 大有民事 可幸 此時還山弄月 幽趣必多矣 江東暮雲 從古流恨 人事分合 何以預知 各分天涯 靈犀自通 恭審楓下
(2) 台座動止 頹唐後萬鬯 奚囊所儲 幾首驚人 瓊什二首 自然聞知矣 何不審愼而自取雌黃 尙憶二字 似是懷古 此則當日改安 誰知二字 此時改安甚好 第二首艸了燈前便焚之云云 此尤不掛於第二眼句也 竝爲三緘之如何 記下一辭郊門 南尋鄕路 往省先壟 仍向加峽 以其方位之不利於兒輩 轉接於楊州直谷 此則桂洞故李相公卜築之郊墅也 一身托衣 何處不就 仍伏定頓 今作楊州之民 而惟幸柴水極佳 距京爲五十里 京第消
(3) 息 逐日聞知 而家兒則許身立朝之地 則不可大歸於窮鄕 且與鯫生處地有異 亦不得免其火炎 而往來京鄕 此兒情地 大是矜悶矜悶 亦復奈何 日與穉孫相戱步園 盤桓於楓林 自以爲餘生之樂 天錫之福 大抵我之此計 有志者深歎憂恨 無情者雌黃鼻笑 果是此宴難舞 命也奈何 餘生之寄命於此地 亦豈前生之定算也 又復奈何 其間漂泊道路 偶吟數首詩 此是直腸之說 不拘時諱者多 幸勿留之 覽卽扯之 此生此世 更無奉話之堦 意欲一詩
(4) 相和 而如此說去 始有不吉之思 有志而未遂 庶可洞諒此心矣 搦管此箋 恨實心結 只自抑塞而已 其間午邊諸益 無論三班 無人不來別 此若數逢 亦有雌黃之及身 竝以一面旋別 當惕之心 庶幾諒悉矣 統希台節 隨時福安 自靖自重 不備 朗照 甲戌九月九日 累生拜 四野汒汒大有秋 晩風吹處見膏流 西陽邨落淡烟起 黃犢渡溪啼毋追 右在始興初程轎中 偶吟卽景
(5) ▣捨人情不欲聞 莫如自靖養天君 十年事爲皆逝水 一時名利亦浮雲 園榭榮華長短異 江魚汨沒是非分 鄕山何處知吾屋 共與邨農好作羣 右自德山回路偶吟 輕筇東至背西陽 觸石垂藤一路長 萬嶂秀聳疑佛首 十灘委曲似羊腸 孤邨絶市人無俗 晩粟成秋峽有香 休問此時究竟事 株兎與我守山庄 右轉入加平偶吟 咄咄書空晝掩扉 餘生自樂解朝衣 世事休論山外客 只看靑嶂白雲歸 右直谷偶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