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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년 이하응 간찰 별지(簡札)
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4_01_A00408_001
- ㆍ입수처
- 창녕조씨 명숙공종가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미상년 이하응 간찰 별지 / 簡札
- ㆍ발급자
-
이하응(李昰應, 1820~1898, 조선, 개인)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조선, 개인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 ㆍ형태정보
-
점수: 1크기: 22.7 × 23.7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율곡연구원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 ㆍ수장고
- 이름: 서가위치: 단위치:
해제
연도미상에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신좌모에게 보낸 일본의 사정을 전하는 내용의 간찰 별지이다. 발신자는 이하응이지만 수신자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내용 중에 귀국(貴國)이라는 용어가 나오므로 중국의 어느 누구에게 보낸 것으로 보인다. 편지의 내용은 중국 만 상서(萬尙書)의 비밀 편지에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그 나라의 내란을 듣고 바삐 돌아갔다고 함을 들었다. 이는 살마주(薩摩州)를 점거하여 에도[江戶] 왜주(倭主)에게 죄를 물으니 그가 이미 고을 떠났고, 관백(關白)이 복위하여 각 도주(島主)가 예전대로 인습하여 서양인을 쫓아내는데 화선(火船)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정보이다. 또 총리아문(摠理衙門)의 말을 들어보면 상대 나라의 일에는 다행이라 하였다. 이런 정보들은 훈도의 편지와 만상서의 통지와 조금 차이가 있는데, 만상서의 편지에는 외무성을 방화했다는 말이 없지만 훈도의 편지는 있고, 만상서의 편지에는 왜주가 고을을 떠났다는 말이 있는데 훈도의 편지에는 없다고 하니 서로 참조해서 보면 좋겠다는 것이다.
원문 / 국역
▣本來從見萬尙書秘緘 有曰 住京倭人 急聞渠國之內亂 忙忙擧帆云 而此是薩摩州擧占 問罪於江戶倭主 似已去鄕 關白復立 各島主依舊承襲 洋人逐去 火船不用 此是渠輩秘奇 從聞於摠理衙門之言 而爲貴國事 幸甚 爲老弟義理 大有光焉云云 而老弟之稱 今謂下生之言也 踵又聞訓導書與萬公通奇 少無相左 萬公書 無外務省放火之言 而訓導書有之 萬公書有倭主去鄕之說 而訓導書無矣 叅互推之 兩事皆有之衅 幸甚幸甚
尙書 萬靑藜(萬靑藜는 淸國의 고위 관료로서 1865년에 禮部尙書가 되고 1878년 이후에는 吏部尙書로 재직하였다. 淸國 인사들이 대원군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天鴈尺芳 등의 尺牘集에서 가장 많은 편지가 수록되어 있을 정도로 대원군과 활발히 교류하였고, 대원군과 한 번도 직접 만난 적 없이 오로지 편지로만 깊은 교분을 맺은 인물이다. 그는 편지로 淸國의 대외 정책, 주변 열강의 동향 및 정보, 그와 관련한 의견을 대원군에게 전하였다.(千金梅, 「대원군 이하응(李昰應)과 청조 문사들의 교류」, 東亞人文學 37, 東亞人文學會, 2016)) 의 비밀 편지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편지에서 萬靑藜는 燕京 주재 倭人들이 본국의 內亂 소식을 급히 듣고 황급히 떠났다고 하는데 이는 薩摩州가 에도를 점령한 것으로서 에도의 倭主에게 죄를 물어 倭主가 이미 떠난 듯하고 關白이 復立하고 각 島主가 예전대로 承襲하며 洋人이 쫓겨나서 火船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는 정보를 전하였다. 또 萬靑藜는 이런 소식은 저들의 기밀 소식으로서 摠理衙門 쪽의 말에서 들었다고 하면서, 조선과 대원군에게 좋은 소식이라고 서술하였다. 이어서 대원군은 訓導의 서찰과 萬公의 통보는 서로 어긋난 부분은 없는데 萬公의 편지에는 外務省이 放火되었다는 말이 없으나 訓導의 편지에는 있고 萬公의 편지에는 倭主가 떠났다는 말이 있으나 訓導의 편지에는 없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