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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심능규 간찰(沈能圭 簡札)
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4_01_A00044_001
- ㆍ입수처
- 창녕조씨 명숙공종가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860년 심능규 간찰 / 沈能圭 簡札
- ㆍ발급자
-
심능규(沈能圭, 1790~1862, 조선, 개인)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윤치용(尹致容, 1798~?, 조선, 개인)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1860년 4월 25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庚申四月二十五日
- ㆍ형태정보
-
점수: 1크기: 28.8 × 38.8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율곡연구원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 ㆍ수장고
- 이름: 서가위치: 단위치:
해제
1860년 심능규(沈能圭, 1790~1862)가 윤치용(尹致容, 1798~?)에게 보낸 간찰이다. 심능규는 강릉에 거주한 사족이다. 자는 사룡(士龍), 호는 호은(湖隱)ㆍ신천당(信天堂)ㆍ천청당(天聽堂)ㆍ월포(月圃), 본관은 삼척(三陟)이다. 1859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저서에 월포기(月圃記), 인경부주(仁經附註)가 있다. 윤치용은 강릉부사를 역임한 인물이다. 자는 대수(大受), 시호는 효헌(孝獻),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1858년 12월 20일에 강릉부사에 임명되었고 1860년 4월 21일에 광주판관(廣州判官)에 이임되었다. 본 편지에서 심능규는 윤치용에게 6월 그믐쯤 관아에 복귀하는지 묻고 있는데, 이를 통해 심능규가 이 편지를 작성할 당시에 윤치용이 광주판관으로 이임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간찰은 관할 주민이 관할 지방관에게 관직을 청탁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강릉 창녕조씨 명숙공종가 고문서 중에는 삼척심씨 가문, 특히 심능규 관련 간찰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데, 조옥현 가의 외가가 삼척심씨이므로 어느 시기에 다량의 삼척심씨 소장 문서가 조옥현 가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먼저 심능규는 윤치용 및 대감의 지위에 오른 그 계씨의 안부를 물었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이 무렵 윤치용은 서울에 올라와 있었는데 신병이 위중해져서 강릉에 복귀할 가망이 없다고 정장(呈狀)하여 광주판관 이유응(李儒膺)과 서로 자리를 바꾸게 하라는 명을 받았다. 아울러 윤치용의 아우는 석취(石醉) 윤치정(尹致定, 1800~1865)이다. 또한 송씨와 윤씨 성을 가진 벗이 서울에 들어갔는지도 물었다. 이어 6월 그믐쯤에는 윤치용이 강릉에 복귀하는지 물었다. 또 자신이 보내는 편지 한 통을 관예(官隸)로 하여금 야동(冶洞)의 김일연(金逸淵)에게 전달하고 답장을 요구하여 문안사(問安使)가 돌아오는 편에 부쳐 보내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대정(大政)이 임박했다고 하면서, 자신을 위해 전관(銓官)에게 청탁을 넣어 달라고도 하였다. 이조판서의 아들인 성천부사(成川府使)가 집안에 머물고 있는지 물으면서 소식을 듣지 못해 매우 답답하다고 하고, 평소 서로 친한 관계이므로 물어본다고 하였다. 참고로 당시 이조판서는 홍종응(洪鍾應)이고 그 아들 성천부사는 홍순대(洪淳大)이다.
- · 최호, 수집사료해제집7, 국사편찬위원회, 2013
참고자료
원문
東樓拜退迨若夢境每瞻西雲曷勝忉忉旱熱比甚伏不審此時靜養氣體候勞攘餘一向萬安令季氏台監亦萬康伏溸區區不任下忱民近以眩暈有時呻囈私悶何達尹令果平安而宋友尹友間或入洛耶耿耿于中何日忘之六月晦間果能還官耶只切望霓之懷也此去書一圅幸須使官隸信傳于冶洞金令逸淵兄許討答付送問安使回便伏企伏企耳 大政不遠 或可爲民送托于銓家耶 仰祝仰祝 長銓之胤成川來留其家云耶 未聞甚菀素與相親若是仰問耳 餘萬非遠書可旣手戰姑不備書禮庚申四月二十五日民沈能圭上書
城主前上書
謹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