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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0년 이내번 호구단자(李乃蕃) 戶口單子)
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3_01_A00162_001
- ㆍ입수처
- 전주이씨 선교장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증빙류-호적(戶籍)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780년 이내번 호구단자 / 李乃蕃) 戶口單子
- ㆍ발급자
-
대도호부사(대도호부사)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이내번(李乃蕃, 1701~1781)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1780년 1월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乾隆四十五年庚子正月 日
- ㆍ형태정보
-
점수: 1크기: 78.1 × 65.6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1780년(정조4) 경자식년을 맞아 이내번(李乃蕃, 1703~1781)이 주호(主戶)로서 주관하여 강릉부에 제출하여 확인 후 환급받은 호구단자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율곡연구원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 ㆍ수장고
- 이름: 서가위치: 단위치:
해제
1780년(정조4) 경자식년을 맞아 이내번(李乃蕃, 1703~1781)이 주호(主戶)로서 주관하여 강릉부에 제출하여 확인 후 환급받은 호구단자이다. 이 문서는 본질적으로는 호구단자이나 그 양식에 있어 준호구의 특성이 많이 혼재되어 있다. 우선 이내번 호의 가족 구성원과 주호 및 처의 4조 기록이 각각의 줄에 열서(列書)되고 있으며, 주호 기록의 시작 부분에 주묵으로 점을 찍어 확인하고 있다는 점 등이 이 문서가 호구단자로 제출되었다가 돌려받은 문서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첫 줄의 “건륭45년경자 정월일 강릉부호구성적(乾隆四十五年庚子正月日江陵府戶口成籍)”이라는 기록은 호구단자와 준호구의 특성이 혼재된 양식이다. 전률통보(1787)의 문서식을 참고하면, 호구단자라면 “부북면 정동제9조산리 호구단자(府北面亭洞第九助山里戶口單子)”라고 기록하여야 하며, 준호구라면 “건륭45년 정월일 강릉부(乾隆四十五年正月日江陵府)”라고 기록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즉 ‘연호기년 모월일 모읍(年號幾年某月日某邑)’이라는 준호구의 서식을 쓰고 그에 이어 ‘호구성적’이라는 호구단자의 성격에서 비롯한 내용을 부기한 것은 호구단자와 준호구의 양식을 혼재하여 기술하고 있다고 하겠다. 준호구로 볼 수 있는 양식도 동시에 나타난다. 문서의 본문이 “고경자호구장내(考庚子戶口帳籍內)”로 시작해서 “등정유호구상준인(等丁酉戶口相準印)”로 끝나고 있는데, 이것은 준호구의 서식과 거의 일치한다. “인(印)”은 끝을 의미하는 투식어로, 분재기(分財記)같은 문서에서 각 항목을 기록한 마지막에 쓰곤 한다. 문서의 끝부분에는 강릉부의 수령으로 3품관 상계인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라는 담당관을 기록한 후 그 아래에 해당 관의 착압(着押)을 각압(刻押)하였다. 문서의 앞부분에 관인(官印) 1과(顆)를 날인하였으며, 문서의 끝부분에는 주협개인(周挾改印)을 기울여 날인하였다. 중앙 아래편에는 주묵으로 “준(准)”이라 기록하였다. 착압 등은 제출한 문서의 진정성을 관에서 인정·확인하였음을 의미한다. 주협개인은 문서의 내용 중 삭제하거나(周), 끼워넣거나(挾), 고친(改) 글자의 수를 나타내고, 없을 경우 “주협무개인(周挾無改印)”을 날인하도록 하였는데, 이 문서에서는 “주협무개인(周挾無改印)”을 상투적으로 날인한 것으로 보인다. 문서를 살펴보면 노비질의 몇 군데를 고치거나 삭제한 부분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내번이 이 호구문서를 작성한 시기는 1780년 정월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8세기 중엽 이후 각 읍의 호적작성은 이미 식년 전해 하반기면 시작되었다. 따라서 식년 정월로 기록된 호구단자는 실제로는 식년 전해에 작성되는 경우가 많이 존재했다. 이내번 호는 현재 선교장이 소재한 강릉시 운정동인 부북면(府北面) 정동(亭洞) 제9조산리(第九助山里)에 소재했다. 몇 통인지는 기록되지 않았고, 통수만 유태망(柳泰望)으로 확인된다. 이내번 호는 유태망 통내 제2호로 편제되었다. 이 호구단자에 따르면 이내번 호는 4구의 가족구성원과 54구의 노비로 구성되어 있다. 가족구성원은 이내번과 그 처 원주원씨 내외, 아들 이시춘(李時春, 1736~1785)과 그 처 안동권씨 내외이다. 이내번은 조선 태종의 2남인 효령대군 이보(李補, 1396~1486)의 11대손으로, 강릉에 입향하여 선교장을 일군 장본인이다. 이내번은 노직(老職)으로 종2품 하계의 가선대부 품계와 역시 종2품인 동지중추부사의 관직을 직역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내번의 나이는 호구단자에는 1863년 계유생으로 88세로 기록되어 있지만, 족보상의 생년은 1703년으로 호구단자와 10년의 차이를 보여준다. 이내번의 4조는 부친이 이주화(李冑華, 1647~1718), 조부가 이광호(李光澔, 1593~1677), 증조부가 이성(李𢜫, 1562~1624)이며, 외조부가 권시흥(權始興)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데 여기에는 족보상 이내번의 조부인 이집(李集, 1619~?)이 누락되어 있다. 즉 족보에 따르면 이광호는 증조가 되고, 이성은 고조로 호구단자에는 기록이 빠지게 된다. 4조의 직역을 보면 부 이주화와 조 이광호에게도 증직(贈職)이 나타나고 있다. 이주화는 종2품 가선대부 이조참판의 관직과 그 겸직으로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와 오위도총부 부총관(副摠管)의 관직에 추증되었다. 그리고 이광호는 예전부터 보유해 왔던 통훈대부의 품계와 전설사(典設司) 별좌의 관직에 이어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의 관직과 그 겸직으로 경연(經筵) 참찬관(參贊官)의 관직에 추증되었다. 이광호의 관사명 앞에는 “행(行)”자가 첨기되어 있는데, 이는 행수법(行守法)에 따른 것으로 통훈대부는 정3품 하계인 반면 전설사 별좌의 관직은 5품이기 때문에 붙인 것이다. 증조 이성의 직역 기록에는 “수성결의분충정운공신(輸誠結義奮忠定運功臣)”과 “완계군(完溪君)”이라는 공신호(功臣號)와 봉호(封號)가 앞뒤로 등장하고, 그 사이에 종2품 하계의 가선대부의 품계와 종2품 이조참판, 정3품 당상관직의 홍문관 부제학, 그리고 지제교(知製敎), 경연(經筵) 참찬관(參贊官), 춘추관(春秋館) 수찬관(修撰官)의 직역이 연이어 등장한다. 정운공신은 1623년 인조반정 이후 폐삭된 공신이다. 이조참판 앞에 쓰인 “행”자는 행수법에 따른 것이지만 가선대부와 이조판서는 같은 종2품이므로 쓸 필요가 없다. 또한 홍문관 부제학은 겸관이 아닌 전임관이었으므로 역시 전임관인 이조참판과는 함께 쓰일 수가 없는 관직이다. 지제교 이하 이어지는 관직은 모두 홍문관 부제학으로써 지니게 되는 겸관직이었다. 처 원주원씨에게도 “정부인(貞夫人)”이라는 2품관의 아내에게 내리는 종부직(從夫職)이 기록되어 있다. 처 원주원씨의 증조 원휘(元徽, 1662~?)는 정3품 하계의 품계인 통훈대부의 품계에 비해 낮은 종6품 결성현감의 관직을 지니고 있어, 역시 관사명 앞에 “행”자를 덧붙였다. 결성은 현재의 충남 홍성 지역이다. 원주원씨의 부 원치대(元治大), 조 원승현(元承賢), 외조 이사일(李士一), 그리고 이내번의 외조 권시흥의 직역은 모두 학생(學生)이다. 아들 이시춘 항목은 맨 앞에 “솔(率)”이라 기록하였는데, 이것은 함께 거주하고 있다는 솔거(率居)를 의미한다. 이시춘은 45세이고, 그 처 안동권씨는 38세이다. 이시춘은 종5품 상계 통덕랑(通德郞)의 품계를 지닌 것으로 확인된다.
이 호구단자의 노비질에는 총 54구의 노비가 등장하는데, 그 중 노는 22구이며, 나머지 32구가 비이다. 여기에는 사망한 3구의 노비와 1769년에 도망한 1구의 노가 포함되어 있다. 이번 식년에는 지난 식년 45구에 비해 9구의 노비가 증가하였다. 사망 등의 이유로 지난 식년 호구단자에서 사라진 노비는 8구인 반면, 이번 식년에 새로 등장한 노비는 17구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는 1776년에 태어난 비 오월(五月)와 같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노비도 있고 매득비 길매(吉每)와 그 아들 신득(申得)과 같이 새로이 매득한 것으로 추정되는 노비도 있다. 그러나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매득비 초분(初分)의 소생 3남매와 그들의 자식 4구 등 이미 예전부터 소유하고 있었던 노비들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노비질을 통해 볼 때, 매득비와 그들의 소생이 노비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비를 집중적으로 매득하면서 비를 중심으로 노비를 경영해 갔으며, 이를 통하여 2세, 3세를 생산함으로써 노비의 보유를 지속적으로 증가시켜 가는 모습을 확인시켜 준다. 부모가 모두 노비일 경우 그 자식의 소유권은 모친의 소유자에게 귀속되었으며, 1731년(영조7) 종모종량법(從母從良法)의 실시 이후 노비의 신분은 모의 신분을 따르도록 규정되었다. 따라서 노보다는 비를 보유하는 것이 노비경영에서 유리하였다. 호구단자 노비질에서 노비의 모를 밝히고 있는 것 역시 노비의 신분과 소유권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원문
乾隆四十五年庚子正月 日江陵府戶口成籍
考庚子戶口帳籍內府北面丁洞第九助山里統首柳泰望統內
第二戶老職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李乃蕃年八十八癸酉本全州
父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 冑華
祖通訓大夫行典設司別坐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 經筵參贊官 光澔
曾祖輸誠結義奮忠定運功臣嘉善大夫吏曹參判弘文館副提學知製 敎兼 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完溪君 惺
外祖學生權始興本安東
妻貞夫人元氏齡八十五丙子籍原州
父學生 治大
祖學生 承賢
曾祖通訓大夫行結成縣監 徽
外祖學生李士一本洪州
率子[官印]通德郞時春年四十五丙辰生
婦權氏齡三十八癸亥生籍安東
奴婢秩 [准]
奴京山年丁未買得婢占德年戊申母私婢岳禮婢金禮年辛卯婢丁今一生奴巨郞伊年癸未買得婢允絶年甲午一生奴癸云
年癸酉買得婢分每年庚戌同婢一生婢勃二妹年癸未二生奴無邑同年戊子三生婢卜每故買得婢年矣年庚戌同婢
二生奴介金年癸未三生奴莫金年庚寅占德一生婢卜女年辛未買得婢草丁一生婢乙分年乙酉買得婢丹伊年
乙巳同婢二生奴德三年丁丑三生奴貴泰年己卯四生婢貴暹年戊子父坤男買得婢三暹故同婢一生婢戊
絶年戊子婢癸禮年壬辰買得婢初先年乙亥母申禮買得婢一禮一生奴天石年戊午二生奴索不年甲子
三生貴山年戊辰己丑逃買得婢甘分年戊戌同婢二生婢月丹年辛未月丹一生婢五月年丙申買得婢㐥
禮年甲子母六月今買得婢率禮一所生奴太三年癸酉二生婢太分年戊寅 三生奴太龍年 三生奴太承婢順每
年辛卯買得婢占伊一生婢奉暹年辛亥六生奴奉億年庚午奉暹一生奴太三年壬申四生奴順擇年辛
卯故婢順折年辛卯買得婢初分二生婢巳分三生奴遠才五生婢甘德同婢巳分一生奴初童三生奴二童
甘德一生婢一妹二生婢金蓮買得婢一丹三生婢勃伊年甲子一生婢壬德年癸巳二生婢壬分年丁酉
買得婢吉每年丁卯同婢一生奴申得年辛卯買得奴癸山年癸未等丁酉戶口相準印
晩德一生婢莫暹年庚辰 [周挾無改印]
大都護府使[着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