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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이씨종약(德水李氏宗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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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에서 태어난 대표적 인물인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의 본관은 덕수이다. 덕수이씨 가문에서는 16세기에 뛰어난 인물이 여럿 배출되었다.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 1545~1598)과 조선 4대 문장가로 평가되는 택당 이식(澤堂 李植, 1584~1647)이 대표적이다. 이식의 할아버지 이섭(李涉, 1550~?)은 이이와 8촌 관계이다. 오늘날 8촌은 집안 큰 행사가 아니면 만날 기회가 흔치 않지만, 당시에는 ‘동고조 팔촌(同高祖八寸)’이라 하여 동일한 조상을 공유하는 가까운 혈연 집단으로 인식되었다. 팔고조도(八高祖圖)의 작성 역시 이러한 친족 의식을 반영한다. 이식의 후손들은 현재 경기도 양평 일대에 거주하는데, 지난 2026년 율곡국학진흥원에서 자료를 조사·수집하고, 그 성과를 󰡔강원국학자료총서 14 - 양평 덕수이씨 문정공파󰡕 도록으로 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덕수이씨 문정공파에서 보관하던 다양한 종류의 고문서와 고서, 유물 등이 확인되었다. 그중 󰡔덕수이씨종약(德水李氏宗約)󰡕을 통해 이 가문에서는 어디서, 어떻게 연소한 자제들을 교육했는지 알 수 있다. 이식은 1616년(광해 8) 조정의 어지러움을 피해 여주 강구촌(康丘村)에서 지냈다. 그러다 1619년(광해 11) 지평(砥平)의 덕수이씨 선영 아래 집을 짓고 ‘택풍(澤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지금도 양평에는 택풍당(澤風堂)이 남아있는데, 이식의 호인 ‘택당’은 바로 이 택풍당을 뜻한다.
집은 다락의 모습과 비슷한 형태로, 높이는 16척(尺)쯤 된다. 가운데의 한 칸을 방으로 만들고는 기둥을 따라서 흙을 쌓아 올리다가 그 반절쯤 되는 지점에다 온돌을 놓고 창을 내었다. 그리고 벽 밖으로 네 기둥을 넓혀서 난간을 두르고 판자를 깔아 마루를 만들었는데, 온돌의 높이와 비교하면 가로가 반쯤 되고 세로는 갑절쯤 되며, 앞에 가로막는 것이 없어서 사방 주위를 멀리 바라다 볼 수가 있다. 마루 아래 동쪽 땅에 움푹 패인 습지(濕地)가 있었으므로 샘물을 끌어다가 네모진 못을 만들고는 못 속의 조그마한 흙무더기를 그대로 놔 둔 채 그 위에다 버드나무를 심었다. 집의 가운데 내부를 채우고 밖을 비게 한 것이나 못 속에 나무를 심어 놓은 것은 모두 택풍 대과(澤風大過)의 상(象)을 본뜨려고 한 것이다. 방 안에는 벽에다 64괘의 도표와 그 상사(象辭)를 나열해 걸어 놓고, 남쪽 창의 양쪽 옆에는 대과(大過)의 상사 여덟 글자를 크게 써 놓았다. 집의 제도는 소박하고 간략한 것을 위주로 하였으며, 위에는 나무 껍질로 덮고 도끼로 다듬어 놓았을 뿐이었다. 󰡔택당별집(澤堂別集)󰡕 권11, 「택풍당지(澤風堂志)」.
위 글에서 이식은 택풍당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보통 집과 달리 가운데 흙을 쌓아 방을 높이고, 밖으로 나온 기둥과 방 사이 마루를 꾸미고 난간을 설치했다는 설명은 현재 전하는 택풍당의 모습과 거의 일치한다. 몇 차례에 걸쳐 중건과 보수를 거쳤지만 원형을 보존하려 했던 후손들의 노력이 녹아있는 것이다.
택풍당
이식은 택풍당을 자신의 공부처이자 강학처로 삼았고, 후손들 역시 이 공간을 통해 연소자제들의 학문을 연마하는 공간으로 활용했다. 덕수이씨 문정공파 후손들은 택풍당 외에도 여러 공간을 학습처로 활용했다. 󰡔덕수이씨종약󰡕에는 택풍당과 함께 경모재(景慕齋)와 강익당(講益堂), 준습재(遵習齋)라는 건물의 존재를 드러내면서 각 건물 이름의 뜻을 밝히고 있다. 경모재는 ‘우러러보고 높이 받들어 사모하는 뜻[景仰尊慕之義]’을 드러내는 공간으로 인근에 덕수이씨 문정공파의 묘역과 연계해 생각한다면 재사(齋舍)일 가능성이 있지만, 다른 건물과의 상관성을 염두에 둔다면 후손들이 선조의 학문과 덕행을 이어받겠다는 의지가 투영된 학습처로 생각할 수 있다. 강익당은 ‘함께 학문을 토론하고 연마하여 서로의 학업과 덕행에 도움을 주는 뜻[講劘資益之義]’을 담고 있는 공간이다. 이는 강익당의 용도가 단순히 강학이 이루어지는 장소라기 보다는 택풍당을 중심으로 형성된 학문 공통체에서 스승과 제자, 혹은 동료 학자들이 모여 경전을 읽고 그 뜻을 논하는 곳을 지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도습재는 ‘가르침을 받들어 지키고 배우고, 익히는 뜻[遵守學習之義]’을 내포한 공간이었다. 즉 이 공간은 이식의 가르침이나 법도를 임의로 고치지 않고 끊임없이 내면화 하는 곳으로 지식의 습득을 넘어 그 존중과 계승 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이렇듯 이식에 대한 존숭 의식이 투영된 공간에서 덕수이씨 문정공파 후손들의 교육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교육의 지향은 「덕수이씨종약서(德水李氏宗約序)」에서 잘 드러난다. 「덕수이씨종약서」는 이식의 손자 이여(李畬, 1645~1718)가 지은 것으로, 동일한 내용이 그의 문집인 󰡔수곡집(睡谷集)󰡕에 수록되어 있다. 이여는 「덕수이씨종약서」의 첫 부분에서 덕수이씨가 문한명가(文翰名家)로 이름이 높지만 경술(經術)과 덕업(德業)을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학습의 지향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제시하였다. 이여의 이러한 의견은 이식이 갖고 있었던 ‘문장가’라는 상징을 의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식의 아버지 이안성(李安性)은 “우리나라는 붕당 때문에 망할 것이라는 말이 증명되고 있다. 네가 비록 요행히 조정에 나가더라도 함부로 명사와 교유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지목을 받게되는 것을 피하도록 하라”고 훈계하였는데, 이식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특정 붕당에 소속되지 않았다. 때문에 그의 문장에 대한 평가는 더욱 두드러졌을 것이다.
덕수이씨종약
이여는 이식의 문장가로서 면모 이외에도 학자적 모습을 강조하면서 이식이 후손에게 제시한 가르침을 상기시켰다. 이식이 후손들을 위해 지은 「시아대필(示兒代筆)」·「추록(追錄)」·「산록(散錄)」과 같은 글들은 유가 경전이나 당시 학술적 의론, 고사 등을 기술한 것이었다. 또한 「시아손등학시준적(示兒孫等學詩準的)」과 「작문모범(作文模範)」과 같은 글은 시를 짓고 글을 짓는 법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이여는 「덕수이씨종약서」를 통해 이식이 제시한 가르침을 후손들이 잊지 말고 가학을 충실히 계승해 학업에 힘쓸 것을 당부하였다. 「덕수이씨종약서」 뒤에는 유학 공부와 과문 공부(科文工夫) 항목을 나누고, 각각 공부하는 순서와 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각각 유학 경전 학습 → 역사서 학습 → 주자학 심화 과정으로 이어지는 단계적 학문 체계가 확인되며, 과거시험 대비 문장 학습이 병행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수신과 입신을 동시에 달성하려는 사족 교육의 전형적 구조를 반영한다. 이처럼 󰡔덕수이씨종약󰡕은 단순한 문중 규약을 넘어 조선후기 사족 가문의 교육 이념과 실천 방식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 특히 택풍당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공간 구성은 학문 수양의 물리적 기반일 뿐 아니라, 상징적 질서를 통해 학습자의 내면 형성을 유도하는 장치로 기능하였다. 또한 경전 중심의 도학적 수양과 과거시험 대비라는 현실적 요구를 조화시키려는 교육 전략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이는 조선후기 사족 사회가 지향한 이상적 인간상, 즉 도덕성과 실천 능력을 겸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체계적 노력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덕수이씨 문정공파의 사례는 가학이 단순한 가문 내부의 교육이 아니라, 공간과 학문이 결합된 종합적 교육 체계였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에서 본 자료는 조선후기 사족의 교육 문화와 지식 전승 구조를 구체적으로 해명하는 데 중요한 사례적 의의를 지닌다.
ㆍ첨부파일 : 덕수이씨종계 참고문헌.hwpx (27.4 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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