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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고종 33) 헌릉獻陵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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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현(율곡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강릉 선교장은 강원지역과 강릉을 대표하는 유적이며, 지금도 후손들이 생활하는 공간이다. 선교장에서 소장했던 다양한 형태의 자료들은 율곡국학진흥원에 기탁되어 강원과 강릉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기탁된 여러 고문서 중 1896년 작성된 헌릉 령獻陵令(종5품)의 보고문이 필자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왕릉은 최고권력자인 국왕이나 왕비, 추증된 국왕과 그 왕비의 무덤을 말한다. 불교 국가였던 고려에서는 왕릉의 관리를 주로 인근에 위치한 사찰이 담당하였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모든 왕릉에 관리를 파견하였고, 그들을 도와주는 수릉군守陵軍을 두었다. 그리고 위전位田과 향탄산香炭山을 떼어주어 경상경비로 쓰게 했다. 흔히 왕릉을 유지하고 운영을 담당하는 직책으로 참봉參奉이 잘 알려져 있다. ‘능참봉陵參奉을 하니 거둥이 한 달에 스물아홉’ 혹은 ‘칠십에 능참봉을 하니 하루 거둥이 열아홉’ 등 능참봉과 관련한 속담이 여럿 있다. 이들 속담은 관직에 진출하고 싶었던 당대인들의 욕망과 능참봉의 업무를 해학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능관직을 경험한 인물들은 능참봉으로 진출해 경력을 쌓아 중앙 아문의 실무직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지방관에 진출하는 모습이 많이 확인된다. 즉 능참봉직을 목민관으로 가는 ‘징검다리’로 활용했던 것이다.
조선이 건국된 직후에는 고려의 제도를 수용하며 왕릉을 관리하는 관직을 임시직인 권무權務로 능직陵直 2인을 배속시켰다. 능직은 품외관品外官이었으나 세조 때 관제개혁을 하며 품내관品內官으로 편입되어 종9품 참봉이 되었다. 조선후기에는 누적된 인사 적체 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능관직이 활용되었다. 두 자리인 참봉직 중 한 자리를 격을 올려 종8품 봉사奉事나 별검別檢, 종7품 직장直長으로 삼았고, 최종적으로는 종5품 령令 1인과 참봉1인 체제로 확정되었다. 령-참봉 체제는 1736년(영조 12) 처음 등장했는데, 헌릉은 이때 건원릉健元陵, 정릉貞陵, 현릉顯陵, 경릉敬陵, 창릉昌陵과 함께 능령陵令이 임명되었다. 능관직의 가장 큰 이점은 국왕을 대면할 기회가 많다는 것이었다. 각 왕릉은 제향일이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국왕이 직접 왕릉으로 가서 제향을 주관하기도 했다. 제향을 마친 국왕은 해당 왕릉의 능관에게 시혜를 베풀었다. 가장 큰 은혜는 품계를 올려주는 것이었다. 품계를 올려주는 경우 보통 종6품이 되었는데 이는 굉장히 큰 혜택이었다. 품계가 6품이 되는 것을 승륙陞六 혹은 출륙出六이라 따로 칭했다. 6품은 지방관으로 진출하기 위한 최소 요건을 충족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조선시대 인사제도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국왕이 왕릉에서 친제親祭 하고, 종9품 참봉을 승륙시킨 사례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데 종9품에서 종6품까지 최소 몇 년을 소비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대단한 특전이었다. 따라서 유력 가문의 자제 중에는 능참봉으로 진출해 짧은 시간에 승진하는 사례가 확인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정조의 처남 김기대金基大는 명릉明陵의 참봉이 된 지 한 달 만에 영조가 친제 후 상으로 품계를 6품으로 올려주기도 했다.
헌릉은 서울시 서초구에 위치해 있다. 현재는 서울에 편입되어 있지만 이곳은 본래 경기도 광주였던 곳이다. 조선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도성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무덤을 쓸 수 있다고 규정해 놓았는데, 왕릉 역시 이 조항을 적용받았다. 따라서 조선에서 조성한 모든 왕릉은 적어도 도성 10리 밖에 위치해 있다. 조선의 3대 국왕 태종太宗은 광주 대모산에 자신의 왕릉이 조성될 곳을 미리 선정했다. 그리고 원경왕후元敬王后가 서거하자 미리 정해 둔 곳에 헌릉獻陵을 조성했고, 태종 자신도 이곳에 묻혔다.
진흥원에 기탁되어 있는 보고서는 1894년(고종 31) 헌릉의 능관 중 능령이 작성한 것이다. 보고에 따르면 밤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뢰배들이 재실에 들이닥쳐서 수직하고 있었던 참봉을 쫓아낸 일이 발생했는데, 헌릉 령이 주변 백성들에게 물어도 누구인지 찾을 수 없었고, 이와 관련하여 보고한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왕릉은 예조禮曹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이 보고문은 헌릉 령이 예조로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보고문을 작성한 사람은 이상우李相宇(1869~?)이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기록을 보면 이상우는 여러 왕릉의 능관으로 재직했다. 이상우는 1894년 7월 처음 온릉溫陵 참봉에 있었는데, 같은 해 식년 사마시에 입격한 이후 관직을 제수받은 것으로 보인다. 방목榜目에 거주지를 강릉으로 기재하였으며, 아버지와 생부, 형제들의 이름을 병기했다. 아버지는 공조 좌랑을 지낸 이회원(李會源), 생부는 이회연(李會淵)이며, 생가 동생으로는 이근우(李根宇)와 이명우(李榠宇)가 기재되었다. 이상우는 온릉 참봉 이후 창릉昌陵 참봉과 효창원孝昌園 봉사를 거쳐 1895년 헌릉 령에 임명되었다. 따라서 이 보고문은 이상우가 현릉에 재직할 당시 작성된 것이다. 해당 사건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다른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아 사건의 결론을 명확하게 알 수는 없다. 이상우가 작성한 보고문은 국한문 혼용체로 꾸며져서 우리나라 근대 문서식이 변화하고 있는 상황이 잘 드러난다. 보고문 말미에는 ‘헌릉관관방인獻陵關防印’이 날인되어 있다. 이는 헌릉에서 능관들이 공식문서를 생산하고 그 효력을 증명하기 위해 찍은 인장이다. 이상우의 보고서에 날인된 인장과 동일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전한다. 율곡국학진흥원에 소장된 ‘1894년(고종 31) 헌릉 령獻陵令 보고’는 강릉 선교장 후손들의 관직 활동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는 동시에, 근대 조선왕릉의 행정 처리 모습과 변화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김충현, 「조선후기 陵官制와 王陵 운영」,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23.
김충현, 「조선전기 壽陵制度의 변화와 그 의미」, 국학연구 46, 한국국학진흥원, 2021.
국립고궁박물관 www.gogung.go.kr/gogung/main/main.do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people.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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