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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 천석 이야기 3 : 천석은 59년 전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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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진(율곡연구원)
1934년 호구단자에 천석은 죽었다고 표기되어 있다. 1843년 이봉구가 주호인 호구단자에는 천석이 보이지 않는다. 그를 더 이상 적기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천석은 선교장 이씨 집안의 노비가 아니란 말인가? 1831년 호구단자에 천석이 보인다. 그러나 옆에 고(故)라는 글자가 있다. 노비의 이름과 나이를 기록한 뒤에는 고나 도(逃)를 적는 경우가 있다. 죽었거나 도망갔다는 뜻이다. 천석은 이미 죽은 상태였다. 1843년은 물론이거니와 1833년에도 천석이 체결한 노비계약서는 존재할 수 없다. 노비를 소유하는 것도 물론 불가능하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계약서 자체가 의심스럽다. 계약을 작성할 때의 차노는 성로(性魯)다. 계약서의 가부를 판단하기 위해 성로부터 확인해보자. 1843년은 계묘년이다. 호구단자는 자, 묘, 오, 유년의 식년에 한 번씩 가계의 호구를 정리한 기록으로, 각 호의 주호(主戶)가 작성해서 관에 제출하는 일종의 호구신고서다. 유사한 것으로 준호구가 있다. 준호구는 호구를 증명할 필요가 있을 때, 관에서 발급해주는 호구증명서다. 쓰임상 서로 인접해있는 문서이므로 나중에는 혼용되기도 했다. 나라는 땅과 사람으로 구성된다. 조선시대의 토지대장은 양안(量案)이고, 호구단자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호적대장은 사람의 기록이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땅과 사람에게서 세금을 거둬들였다. 그러나 땅을 조사하기는 어렵고 사람을 헤아리기는 쉽다. 땅은 묵묵히 내어줄 뿐이지만 사람은 기쁘게 받고 고통스럽게 내어준다. 세수는 결국 사람을 향했다.
성로라는 이름이 1843년의 호구단자에 있어야 한다. 이 점이 확인되지 않는다면 위 문서의 내용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1843년 호구단자 A003_01_A00181_001의 노비질 뒷부분에 성로에 관한 기록이 있다. “비 득녀의 을미년생이다. 득녀의 첫째는 노 성무로서 정사년생인데 죽었다. 셋째는 노 성로로 병인년생이다. 넷째는 비 순녀로 갑술년생이다. (婢得女年乙未同婢一生奴性斌年丁巳故三生奴性魯年丙寅四生婢順女年甲戌)” 성로는 득녀의 삼남일녀 중 셋째로 나이는 당시 38세였다. 1844년의 전답매매문기 A003_01_A00250_001에도 성로가 대리계약자로 기록되어 있다. 성로는 주로 1840년대의 거래계약서에 등장한다. 조선시대의 수노들은 대체로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에는 적지 않은 나이다. 1843년 계약서의 대리 계약자인 성로의 신분은 분명하다. 문제의 1834년도 호구단자로 돌아가 보자.
앞의 예에서 보았듯이 노비질에서는 ‘이름→나이→소생’의 순서로 기술된다. 노비의 가계는 모계를 따른다. 성로도 어머니인 득녀의 몇 번째 소생이라는 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1834년의 호구단자에 천석이 등장한다. “비 일례의 셋째는 노인 천석으로 죽었다. 첫째는 노인 어둔금으로 죽었다. (婢日禮三生奴千石故一生奴於屯金故)” 천석이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는 것은 이미 말했는데, 그의 형인 어둔금도 사망한 상태였다. 일례에 관해서는 별다른 설명이 없다. 1843년에 이르면 천석의 어머니인 일례에 대한 기록도 없다. 두 아들을 잃은 일례는 1843년 이전에 사망했을 것이다. 이전의 기록은 어떨까?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되집어 내려와 보자.
1765년 이내번(李乃蕃) 호구단자(戶口單子)
이 문서의 노비질 뒤쪽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매득한 비 일례의 첫째는 노인 천석으로 나이는 27세이며 무오년 생이다. 둘째는 비 삭질로 올해 21세이며 갑자년 생이다. 셋째는 비인 귀례로 나이는 17세이며 무진년 생이다. 買得婢日禮一所生奴千石年二十七戊午二所生婢索叱今年二十一甲子三所生婢貴禮年十七戊辰” 노비는 이름 앞에 어머니를 밝혀둔다. 종법제도에 따라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것과 대비되게도, 노비의 이름 앞에는 어머니의 이름이 따라붙는다. 어머니가 누구인가에 따라 노비의 소유권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에서 어머니인 노비가 매득한 것인지 남의 비인지 혹은 윗대의 비인지를 밝혀둔다. 노비는 소유물이었고 그 이름에는 소유권과 관련된 표식이 붙었다. 요 며칠 사이에 큰 눈이 왔다.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던 눈덮인 대관령이 돌연 갑갑하게 느껴졌다.
천석의 어머니는 매득한 비다. 그의 이름 뒤에 나이와 생년이 적혀 있지 않은 것은 일례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762년의 호구단자 A003_01_A00194_001 문서에는 일례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내번은 일례를 1762년~1765년 사이에 매득했고, 그녀는 곧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자식들도 이내번이 한꺼번에 매득했을 가능성이 있다. 노비를 한꺼번에 매매하는 일은 적지 않았다. 이내번은 강릉지역에 등장한 신흥강자였다. 매득한 내력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일례의 신분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천석은 이때 이미 27세 였다. 1834년도 호구단자에 천석의 형으로 표기되어 있던 어둔금은 1786년의 이익조(李益朝) 호구단자(戶口單子), A003_01_A00164_001에 따르면 삼섬(三暹)의 둘째 어둔(於屯)으로 되어 있다. 노비질의 내용은 그다지 정확하지 않다. 특히 통시적으로 살펴볼 때 그런 점이 두드러진다.
같은 호구단자에 따르면 천석의 형제는 둘째인 삭불(索不)과 귀산(貴山)이다. 삭불은 1774년 호구단자에는 삭부리(朔夫里)로 되어 있고, 177년 호구단자에는 삭불(索佛)로 되어 있다. 셋째인 귀산은 1768년 호구단자에는 귀례라고 되어 있는데, 1771년의 호구단자에는 기축년에 도망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축년이라면 1769년이다. 귀례는 1748년생이다. 도망갔을 때 22살이었다. 힘이 장사였을 꽃 같은 나이의 청년은 대관령을 넘었을까? 오대산 기슭에 스며들어 화전민이 되었을까? 타지로 가서 제법 성공한 상인이 되었을까?
1786년 호구단자에 삭불이 갑진년에 죽었다고 나온다. 1784년이다. 천석은 1765년에 27세였으므로 이해에 46세였을 것이다. 네 살 아래의 동생 색불이 4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갑진년에 까마득하고 절망스러운 일이 있어, 일례의 둘째는 생을 마감했다. 천석은 살아남아서, 1792년 이익조 호구단자에도 이름이 보인다. 다음 식년인 1795년에 호구조사가 이뤄졌고, 선교장에서는 마찬가지로 이익조를 주호로 하는 호적신고서를 제출했다. 그곳에도 천석의 이름이 나온다. "일례의 소생인 천석 무자년 생은 죽었다. (一禮所生奴千石年戊子故)" 그는 죽었다. 1765년 이내번 호구단자에는 천석이 무오(戊午)생으로 되어 있다. 보다 뒷기록인 1795년의 호구단자에 보이는 무자(戊子)년은 오류일 것이다. 천석은 1792년~1795년 사이에 사망했을 것이다. 1765년에 이미 27이었으므로 이 때는 55~57세 사이였을 것이다. 현재의 나와 비슷한 나이다. 천석은 살만큼 살다 죽었다. 사람으로 태어나 노비로 죽었다. 조선 후기에 산송(山訟)이 많았다. 주인이 없던 산에 쓴 산소의 영역을 두고 다툼이 많았다. 이때 증빙을 위해 산도(山圖)를 그려서 판결하곤 했다. 출처가 경상도 지역인 문서를 정리하다가, 판결문의 뒤쪽에 그려진 산도를 보았다. 꼼꼼하게 경계를 표시하고 소유자를 명기해두었다. 그 구석에서 노자총(奴子塚)이라는 표식을 보았다. 천석의 동생은 이씨의 선산 가장자리 어디 쯤에 함께 묻혔을 것이다. 그로부터 50년 쯤 지난 1833년에 천석은 앵매와 그녀의 딸인 상절을 52냥에 매입했고 10년 뒤에 상절을 50냥에 매도했다. 지금까지의 추론에 문제가 없다면, 천석의 매매는 모두 거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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