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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 천석 이야기 2 : 천석은 노비를 소유한 노비였다
정우진(율곡연구원)
1843년 11월 16일 흐린 겨울 날, 통천군수를 지낸 이봉구의 종 천석이 자신의 노비인 앵매의 딸 상절을 주인 이봉구에게 매도했다. 아무래도 쉬이 믿어지지 않는다. 노비가 노비를 소유했고, 자신의 노비를 자신의 주인댁에 팔았다니. 상식에 위배되는 상황을 확신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증거가 필요하다.이용구는 1837년에 졸한다. 이용구가 사망하기 4년 전에 작성된 노비매매문기가 있다. 4년 전인 1833년에는 아직 이회숙의 아버지인 이용구가 살아 있었다. 1834년 계묘년에 작성된 호구단자(문서번호 A003_01_A00184_001)에 그는 생원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이용구는 생원이라고 불렸다. "생원인 이용구의 나이는 37세로 무오년 생이며 본은 전주이다. (生員李龍九年三十七戊午本全州)" 1833년에 발급된 노비 매매 문기(문서번호 A003_01_A00445_001)에도 이생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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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광 13년 계사년 12월 21일 이생원댁 노 천석에게 글을 쓴다.
우측에서 글을 쓴 까닭은 내가 긴요하게 필요한 바가 있어 매득한 비 갑자생 앵매와 앵매의 첫째 갑신생 상절을, 결정한 가격 52냥을 정확히 받고 영원히 방매하니 훗날에 계약 당사자 자손 중에 이에 관해 어지러운 말을 하는 일이 있으면 이 문기를 가지고 바로잡을 것이다.
재주 엄일복 착명
증필 이생원댁 노 소갑생 착명
갑자년은 1804년, 갑신년은 1824년이다. 1833년 위 계약서가 작성될 때 앵매는 서른, 상절은 아홉 살이었다. 50대가 넘어섰다면, 어릴 때 어른 들이 집안 문서를 중시하는 것을 본 일이 있을 것이다. 계약서가 소유권의 강력한 근거였던 문화의 습성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전근대시기에는 계약서가 거래가 이뤄진 후에도 특정한 대상의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현재는 전산처리된 등기부가 그 역할을 대신하므로 매매 계약서는 등기를 위한 근거 자료로서만 한시적으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전근대 시기에는 달랐다. 이런 이유로 새로 거래를 할 때는 거래 대상을 거래한 과거의 기록, 즉 과거의 거래계약서를 함께 넘겨줬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과거의 거래계약서를 가지고 새로운 계약이 위조된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거의 거래계약서를 현재의 신문기(新文記)에 대해 본문기(本文記) 혹은 구문기(舊文記)라 하고, 본문기를 넘겨주지 못하는 경우에는 그 사정을 밝혀두는 것이 계약서 작성의 룰이었다.
A003_01_A00597_001번 문서는 1775년 2월 7일 유학 최우창이 김진국에게 논을 팔면서 작성한 논 매매 문기다.
![]() 일곱재 줄의 ‘本文記段 他田畓幷付乙仍于 不得許給’은 '본문기에는 다른 전답이 함께 붙어 있기 때문에 내줄 수 없다'는 뜻이다. 애초에 매입했던 전답 중 일부만 매매할 때, 혹은 상속받은 재산 중 일부만 매도할 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 앞에서 말한 1833년의 노비 매매 문기(문서번호 A003_01_A00445_001)는 1843년에 천석이 이진사댁에 상절을 매도하면서 작성한 신문기의 구문기, 즉 본문기다. 이생원이라고 나오는 이는 당시인 1833년 선교장의 주호였던, 이봉구의 형 이용구일 것이다. 구문기의 존재는 당연히 새로운 계약의 존재를 지지한다. 그렇다면 노비가 노비를 소유하고 자신이 소유한 노비를 자신의 주인댁에 매도한 이 이상한 상황은 비교적 분명한 근거를 가진 사실로 볼 수 있다. 19세기 중반 강릉에서 굉장히 낯선 일이 있었던 셈이다. 이생원댁, 즉 이용구의 노비 천석이 1833년 엄일복에게서 앵매와 상절을 매입했고, 1843년 무언가 사정이 있어서 상절을 자신의 주인인 이진사, 즉 이용구의 사후 선교장의 주호가 된 이봉구에게 매도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쉽사리 믿기지 않는다. 본래부터 노비였던 이가 주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앵매와 상절을 매입하고, 뒷 날 이 중 상절을 주인에게 매도하는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조선시대의 호구단자(戶口單子)와 준호구(准戶口)는 현대의 호적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집안의 구성원에 관한 공증서의 성격을 지니는데, 노비도 기록하고 있다. 호구단자와 준호구에서 노비의 명단을 싣고 있는 부분을 노비질(奴婢秩)이라고 한다. 천석이 정말 이용구와 이봉구 등의 노비였다면 호구단자 혹은 준호구의 노비질 명단에 그 이름이 있어야 한다. 1834년 이용구의 호구단자(문서번호, A003_01_A00180_001)에는 천석의 이름이 있다. 그의 어머니는 일례(日禮)였다. 천석은 일례의 셋째였다. 천석의 형은 어둔금이다. 일례의 둘째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다. 1831년 이후의 호구단자(문서번호, A003_01_A00179_001)에도 같은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천석이 이생원댁의 노비였다는 점과 앞의 의심스러웠던 상황도 매끄럽게 설명되는 듯했다. 더 이상의 의심을 거둬들이려 하고 있을 때, 놀라운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 A003_01_A00180_001, 1834년 이용구 호구단자
위 문서는 1834년 이용구의 호구단자다. 이 자료에서 하단의 노비질이라고 쓰여 있는 곳에 적혀 있는 것이 노비와 관련된 내용이다. 순서대로 오른쪽에서 여섯번째 줄 중간부분에 "비 일례의 셋째 천석 사망 (婢日禮三生奴千石故)'이는 표현이 보일 것이다. 노비의 이름 뒤에 나이가 나오지 않는다면 사망했다는 뜻이다. 천석의 어머니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는데, 천석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된 일일까? 죽은 이가 어떻게 자신의 노비를 주인댁에 매도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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