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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 천석 이야기 1 : 상절은 노비의 노비였다
정우진(율곡연구원)
조선시대의 노비는 거래대상이었고, 남아있는 노비매매문기는 결코 적지 않지만, 다른 국학기관에 비해 율곡연구원에는 노비매매문기가 많지 않은 편이다. 연구원 소장 문서가 주로 영동의 중심이었던 강릉 문서라는 점을 고려할 때, 강릉에 노비거래가 많지 않았을 수도 있겠으나, 그리 자랑스럽지 않은 문서를 보관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그럴듯하고, 타지역에 비해 강원권의 자료수집이 늦었던 관계로 알려지지 않고 있을 뿐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이 문제는 앞으로 더 생각해봐야 할 주제이긴 한데, 그래도 강원 한국학 아카이브에는 자신을 노비로 파는 계약서인 자매(自賣)문기를 포함해서 12 건의 노비매매문기가 서비스되고 있다. A003_01_A00378_001 문서도 율곡연구원에서 조사정리한 노비매매문기 중 하나다. 직업이 문서를 다루는 것이므로, 그리고 그 와중에 노비매매문기를 적지 않게 접해왔으므로, 이 문서도 별 생각없이 정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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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광 23년 계묘년 11월 16일 이진사댁 노인 성로에게 글을 쓴다.
우측에서 글을 쓴 까닭은 내가 요긴하게 쓸데가 있어서 샀던 비인 앵매가 낳은 첫째 딸 갑신생 상절을, 결정한 가격 50냥을 정확히 받고 영원히 매도하니 뒷날에 이에 관한 어지러운 말이 있으면 이 문기를 가지고 관에 고하여 바로 잡을 것.
비의 주인 이노 천석 [착명]
증필 이노 갑생 [착명]
이노 달득 [착명]
지나치려는데 눈길이 두번째 줄의 '吾以要用所致'에 멈췄다. 매매계약서에는 이씨의 노비인 천석이 자신을 비주(婢主: 노비의 주인)라하면서 사인했다. 앵매와 앵매의 딸인 상절은 노비인 천석의 노비였다. 어떻게 된걸까? 노비가 노비를 소유하는 것이 가능했던가? 매매시에는 수노(首奴) 혹은 차노(差奴)라 불리는 노비가 주인을 대신해서 계약을 체결한다. 이런 관례가 반영된게 아닐까? 즉, 천석이 자신의 주인을 대신해서 계약을 체결했을 뿐, 앵매와 상절의 본래 주인은 천석의 주인이 아닐까? 그렇다면 밑줄 친 부분이 잘 설명되지 않는다. 주인을 대신하는 경우에는 위의 '吾以要用所致'의 '吾'자리에 '吾矣上典宅'이라는 말이 들어가야 한다. A003_01_A00643_001에서 이 관행을 확인할 수 있다.
![]() 오른쪽에서 두 번째 줄은 右明文爲吾矣上典宅으로 시작된다. 이곳의 吾矣上典이 나의 상전이라는 뜻이다.
쉽사리 믿어지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그것도 후기에 노비의 주인이 노비인 경우가 있었다니. 그러나 지금까지 검토한 자료에 따르면 천석은 앵매와 상절의 주인이다. 의심을 거두지 말고 시선을 넓혀보자. 천석의 주인은 누구일까? 천석은 '이의 노'라 하고 있는데, 행간을 보면 이 문서의 수급자인 이진사로 보인다. 이 문서는 선교장의 것이다. 지역학에서 선교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자료를 보존하기 위한 선교장의 노력이 없었다면 강릉학과 영동학의 미래에 대해 그렇게 큰 기대를 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선교장의 전통을 지켜온 분 들에게 한량없는 감사를 드린다. 선교장은 이내번(李乃蕃, 1703~1781), 이시춘(李時春, 1736~1785), 이후(李垕, 1773~1832), 이용구(李龍九, 1798~1837)·이봉구(李鳳九, 1802~1869), 이회숙(李會淑, 1823~1876)으로 이어진다. 시기와 진사라는 호칭을 고려할 때 천석에게서 노비를 매입한 이는 이용구, 이봉구, 이회숙 중 한 명일 가능성이 있다. A003_01_A01083_001는 이용구의 백패 즉, 생원 입격을 증명하는 자료다.
![]() 소과인 생원시와 진사시의 입격자에게는 백패를 대과인 문과 급제자에게는 홍패를 발급한다. 이용구는 1825년 28세 되던 해에 생원시에 3등 36위로 입격했다. 생원시의 입격자는 1등이 5명, 2등이 25명이다. 3등 36위이므로 66위로 입격한 셈이다. 진사시에는 입격하지 못했으나, 조선 후기에는 생원이라는 호칭이 김생원, 이생원 처럼 생원시에 입격하지 못하는 이들의 호칭으로도 사용되는 경향이 있었고, 이에 따라 생원시 입격자들을 진사로 호칭하기도 했다. 이용구도 이진사로 불릴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용구는 1837년에 졸했으므로, 1843년도에 체결된 이 계약서의 주인일 수는 없다. 흥선대원군 이하응과도 친밀한 관계였던 이회숙은 이용구의 장자다. 1840년 18세에 생원시에 입격했고, 1858년(철종 9) 36세에 음사로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에 임용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본명은 이조황(李祖潢)으로 1869년 47세에 현재의 통천군 흡곡현감(歙谷縣監)에 임용되었다. 아버지 이용구와 달리 현직에서 10여 년간 관직생활을 했으나 진사시에 입격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배경으로, 이진사로 불릴 수 있다. 그러나 이 거래가 있을 당시의 호구단자 A003_01_A00181_001에는 현대의 호주에 해당하는 주호가 이봉구로 되어 있다. 이곳의 진사는 이용구의 동생이자 이회숙의 종부인 이봉구다. 이봉구는 선교장 가계(家繼)에서 가장 반짝이는 인물이다. 형인 이용구가 마흔에 졸하자 집안을 이어받아 형수와 조카들을 돌봤다. 그는 1822년에 익릉참봉(翼陵參奉), 1825년에는 선릉직장(宣陵直長)이 되었다. 1827년에는 함창현감(咸昌縣監)을 역임하고 1830년에는 흡곡현령(歙谷縣令)을 지냈으며 1832년 통천군수(通川郡守)가 되었다. 흡곡은 후에 통천으로 통합되었다. 이후에도 황주목사(黃州牧使) 등을 지냈다. 승정원일기의 1843년 11월 16일 기록을 보면 17일 새벽까지 비가 내렸다고 한다. 강릉의 겨울 날씨가 영서지방과 다르긴 하지만 마찬가지로 흐렸을 수 있다. 겨울 비가 내릴 듯이 흐린 날 이봉구가 자신의 노비인 갑생과 달득을 보내어 천석의 노비를 매입하도록 시켰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보자. 위 문서에는 쉽게 믿기지 않게도 노비가 주인이라고 적혀 있다. 천석은 정말로 앵매와 상절의 주인이었을까? 경쟁가설은 천석이 자신의 주인을 대신해서 계약을 체결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위 문서에 '나의 상전댁'이라는 표기가 있다면 이 해석이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위 문서에는 그런 표기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석은 자신의 상전을 대신해서 위 거래를 진행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계약서 말미에 나오는 '비주 이노 천석'이라는 말에서 '이'는 이진사가 아닌 다른 이를 가리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위 계약서에는 이에 대한 어떤 단서도 없다. 현재로서는 1843년의 노비 매매 계약서에서 두 개의 이야기를 길어낼 수 있다. 하나는 천석이 주인을 대리해서 계약을 체결했을 뿐이라는 상투적인 이야기이고, 둘째는 천석은 이봉구의 노비로서 앵매와 상절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확신이 들지 않으면 다시 돌아와서 첫번째 이야기가 들려주는 사연을 들을 수 있도록, 첫번째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두번째 이야기를 들어보자. 두번째 이야기에 따르면 위 문서는 노비가 자신의 주인에게 자신의 노비를 매도하는 계약서인 셈이다. 이걸 정말로 믿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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