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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아들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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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형묵의 이름과 자를 명명하는 글 [命子衡默名字說(A010_01_A00079_001)]
김철운(율곡연구원)
오늘날 경제력에 의해 사회의 대부분이 좌우되는 현실에서 공자(孔子)가 말한 “아버지는 아버지답다(父父).”의 “~답다”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떠한 의미로 받아들여질까? 즉,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역할을 무엇이고, 또한 자식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이며,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 과연 아버지의 자식 사랑에는 방점이 있는가? 그런데 대체로 사람들이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간혹 아버지란 존재는 근접하기 어려운 감은 있으나 한편으로 그 존재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편안함을 느낀다고 말하곤 한다. 이렇게 보면 “현재의 ‘아버지’는 현재의 ‘자식’에게 어떻게 비춰질까?”라는 물음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율곡연구원의 수장고에는 많은 전적류(典籍類) 이외에도 교지(敎旨), 간찰(簡札), 명문(明文), 분재기(分財記) 등 다양한 고문서들이 즐비한데, 이 고문서들은 각각의 특별한 사연을 담고 있고 항상 그 사연들을 세상에 널리 알려줄 많은 이들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그 많은 고문서 중 특별히 눈길을 끈 것이 있었는데, 이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깊고도 넓은 사랑’을 잘 보여주는 한 장의 고문서였다. 이 문서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물론 그 어떠한 사랑도 결코 수치로 계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주 잘 그려내고 있다.
[ 명자형묵명자설(命子衡默名字說) ]
위의 문서를 작성한 주인공은 강릉최씨 참판공파(산황파) 12세손인 최광휘(崔光彙: 1728∼1800)이고, 그 고문서의 제목은 「아들 형묵의 이름과 자를 명명하는 글[命子衡默名字說]」이다. 간단하게 말해, 이것은 그 자신의 아들 형묵(衡黙)이 출생하기까지의 남에게 쉽게 드러내기 어려운 가슴 아픈 가족사와 아들의 이름[名]과 자(字)를 짓게 된 과정 및 아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지켜야 할 내용을 진심 어린 마음에 담아 전하고 있다. 이 글이 쓰인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대략 아들 형묵이 15세 되던 해인 1785년(정조 9) 이후로 추정된다. 우선 최광휘를 간단하게 소개하면,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의 「효행록(孝行錄)」에는 그가 어려서부터 성품이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학식이 매우 높았던 인물로, 특히 어버이의 병환에 배설물을 맛보아 가며 치료하였고, 임종에 이르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넣어 드리는 등 생명을 여러 번 소생시켰으며, 한편으로 흉년에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토지를 팔아서 구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효행이 조정에까지 널리 알려지면서 그는 생전인 1794년에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임명되었고, 그의 사후인 1854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겸(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에 증직(贈職)되었다. 이러한 가풍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난 아들은 아버지의 그러한 성품에 영향을 받으면서 잘 성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 1794년 최광휘 교지 ]
[ 1854년 최광휘 교지 ]
고문서의 내용은 최광휘가 자신 집안의 가슴 아픈 가족사를 밝히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즉, 그 자신의 가문은 본래 강릉부(江陵府) 남쪽 장현(長峴)에서 살았는데, 일곱이나 되는 형제자매가 대부분 어려서 죽게 되자 그의 아버지 최태관(崔泰觀: 1689∼1773)이 집터가 좋지 않다고 여겨 북쪽 산황동(山篁洞)으로 이사하여 자손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그 자신도 27세(1754, 영조 30)에 아들 세 명 중 두 명을 잃는 큰 아픔을 겪기도 하였지만, 그로부터 17년 뒤인 그의 나이 44세(1771, 영조 47) 때에 소중한 아들을 한 명 얻었다. 아마 이 문서는 아들의 바른 성장과 미래의 행복을 간절하게 염원하는 마음에서 작성된 ‘사랑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최광휘는 그 아기가 태어났을 때 왼쪽 귀가 완전하지 못해 모양이 풀잎이 처음 싹트는 것처럼 생겼기에 맹이(萌耳)로 불렀다가 사람들이 새김의 소리가 음귀(蔭貴)와 비슷하다고 하여 그렇게 부르기에 그것을 아명(兒名)으로 삼았다. 그 뒤에 아이가 15세 되던 해(1785, 정조 9) 겨울에 관(官)에서 열린 백일장(白日場)에 합격하여 오원(五院, 향교)에 들어가 공부할 때가 되자 비로소 “형악(衡岳)의 움직이지 않음을 본받고, 권형(權衡)의 지극히 바름을 본받으라.”는 의미에서 아이의 이름을 형묵(衡默)으로 짓고 자(字)를 구령(九寧)으로 지었다. 이에 그는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시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김시습의 〈삼각산(三角山)〉 시에 “한데 모여 솟아오른 세 봉우리 하늘을 뚫고 올라갔으니, 능히 동방을 만세토록 평안하게 하리라.[束聳三峯貫太淸, 能使東方萬世寧.]”라고 하였다. 형(衡)은 오악(五嶽)의 하나로 남방을 안정시키는 산이니 어찌 구주(九州)를 평안케 하지 않겠는가? 구령(九寧)이라고 자(字)를 지은 것은 이 때문이다. 또 형악(衡岳)은 움직이지 않지만, 공리(功利)가 저절로 만물에 미치고, 권형(權衡)은 지극히 바르면서 아주 작은 무게도 저울의 눈금에 나타날 수밖에 없다. 대저 움직이지 않음과 지극히 바름은 그 뜻이 묵묵함과 편안함에 가깝지 않겠는가?
간단하게 말해, 형묵(衡黙)이란 이름에는 맹자의 ‘외부 사물의 영향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마음’인 ‘부동심(不動心)’으로 항상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면서 행동거지에 불편부당(不偏不黨)함이 없게 해야 한다는 의미가, 구령(九寧)이란 자(字)에는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편안해진다’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최광휘는 아들의 이름[名]과 자(字)를 짓는 것에 멈추지 않고, 아들이 앞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삶의 지혜에 관한 몇 가지 내용을 조근조근한 말로 명확하게 알려준다. 첫째, 모든 일의 의리는 일이 선하면 하고 일이 악하면 하지 않는 것이다. 즉, 일이 선하더라도 자기에게 해가 되면 하지 않고, 일이 악하더라도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하는 등의 행위를 어떤 경우에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의리를 실행하려면 반드시 천하 물건의 경중(輕重)을 공평하게 재는 저울(權衡)처럼 항상 마음가짐을 공정하게 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중용(中庸)의 삶에 기반하여 얻었다고 해서 즐거워하지 않아야 하고, 잃었다고 해서 근심하지 않아야 한다. 물론 이러한 삶을 확장해 나갈 때 만나는 것이 바로 선한 본성에서 나오는 공감(共感) 능력인데, 이는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삼고, ‘남’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영광과 경사가 모여들어도 나와 상관없는 사물을 보듯이 하고,……이익이 오면 하늘에 돌리고 손해가 오면 돌이켜서 자신을 반성해 보며, 현명함과 어리석음[賢愚], 선함과 악함[善惡]에 대해 사사로운 마음[私心]을 써서 낮추거나 높이지 말거라. 기쁨을 드러내지 않고 노여워도 불평하지 않는 것은 지인(至人)이 마음을 바르게 하는 요체이다.”라고 하였다. 셋째, 재물을 억지로 얻으려 하지 않아야 하고, 남과 다툴 때는 이기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 즉, 남과 다투어 이기려고 하지 않으면 원망과 비방을 듣지 않게 되고, 재물을 얻으려고 하지 않으면 비루하고 인색한 마음이 저절로 사라지고. 비루하고 인색한 마음이 저절로 사라지면 남이 나를 볼 때 반드시 천박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며, 원망과 비방을 듣지 않으면 자기가 세상을 살아갈 때 걸리고 막힘이 없다는 것이다. 끝으로 최광휘는 형묵이 언제 어디서 어떤 행동을 하든지 간에 항상 ‘형묵’이란 이름의 본 의미를 되새기면서 자신의 굳건한 의지로 묵묵히 세상을 살아갈 것을 간곡히 말하면서 글을 마친다.
너는 더욱 신중하고 더욱 노력하거라. 앞에서 말한 것은 중단하지 않고 실천한다면 군자가 되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너에 대해서 날로 발전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나의 마음에 어찌 가상하고 기쁘지 않겠느냐? 또 만 마디 말을 하여 만 마디 말이 모두 타당할지라도 한 번 묵묵히 있는 것만 못하니, 묵(默) 자를 이름에 넣은 것은 그 의도가 있는 것이다. 움직일 때나 고요히 있을 때나 일을 행할 때나 그칠 때마다 이름을 돌아보고 뜻을 생각하기 바란다.
결국 최광휘가 아들에게 지어준 형묵(衡墨)과 구령(九寧)에는 아들의 ‘경제적·사회적 성공’을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라 아들의 무병장수는 물론이고 혼탁한 세상의 시류에 휩쓸리지 말고 항상 올곧은 마음을 가지고 중용(中庸)의 삶을 살아가면서 세상과 조우 하기를 바라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깊고도 넓은 사랑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 1810년 최형묵 준호구 ]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어떠한 연유에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광휘 자신도 아명(兒名)인 일빈(日彬)을 30대 후반 넘어서 광휘(光彙)로 개명(改名)하였으며, 아울러 최형묵(崔衡墨: 1771∼?)도 40세 때에 형묵(衡黙)을 수형(守衡)으로 개명하였는데 이는 그가 1810년(순조 10) 정월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에서 발급받은 준호구(準戶口)에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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